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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오래된 도시에서 피어난 황금빛 종합예술 / 클림트,베토벤 프리즈
  • 작성일2020/11/2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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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미술과 음악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무형의 느낌만으로 곡을 완성하고, 연주해 내는 작곡가들의 작업 방식에 크게 감명을 받은 화가들은 추상화를 탄생시키고, 화성악에서 모티브를 따와 점묘법을 완성시켰다. 클림트는 새로운 기법과 화풍을 만들어내는 대신 예술의 범위를 한 단계 더 넓히는 과감한 도전을 시도한다. 과거에 함몰돼 있는 역사주의의 도시 빈에서 전시공간과 음악, 미술을 결합한 새로운 종합예술의 핵심에는 ‘베토벤’이 있었다.
 


Gustav Klimt, Kiss, ⓒWikiArt / Gustav Klimt, judith and holopherne, ⓒWikiArt

<키스>, <유디트> 등 여인들의 관능미를 황금과 함께 화폭에 녹여내 ‘황금의 화가’로 불리는 클림트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술계에 불던 종합예술운동을 오스트리아에서 실현한 ‘빈 분리파’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분리파는 ‘분리된 서민’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귀족들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로마 서민들이 도시 외곽에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 사건에서 따왔다.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가 시작한 미술공예운동에서 시작된 분리파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빈 분리파다.

당시만 해도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던 대(大)국제도시였지만, 진보 예술가들의 눈에는 보수주의가 팽배해 옛것만을 반복적으로 답습하는 고립된 도시에 불과했다. 미술계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보수적인 기존 미술가들의 입김에 새로운 미술가들의 전시는 여러 차례 무산되었고, 이에 클림트를 중심으로 19명의 젊은 오스트리아 미술가들이 빈 분리파를 창설한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한편 미술계 국제교류의 물꼬를 텄다. 이전까지 빈 사람들이 접하지 못했던 마네, 고갱, 고흐 등 새로운 화풍의 작가들을 소개한 데 이어 분리파만의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회 전시에서 얻은 수익금을 가지고 분리파 전시를 위한 전용 건물을 만들었다. 전시장 내부 공간은 가벽을 이용해 다양한 공간 연출이 가능했는데, 이곳에서 열린 제14회 분리파 전시회는 공간·조각·회화·음악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예술의 절정에 도달했다. 이때 전시는 베토벤의 천재성을 기리는 ‘베토벤 특집 전시’처럼 구성되었는데, 당시 베토벤이 후원자나 관객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음악에서 추구하고 싶은 이념을 마음껏 펼쳤던 최초의 작곡가로서 그를 추앙하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림트의 회화, 막스 클링거의 조각 등 베토벤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러 들어온 입장객들이 전시관에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4악장을 빈 교향악단의 연주로 들으면서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공감각적인 총체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한 전시였다.



Gustav Klimt, the beethoven frieze the hostile powers (left part-detail), ⓒWikiArt



Gustav Klimt, the beethoven frieze the longing for happiness finds repose in poetry (right wall), ⓒWikiArt

클림트는 전시장의 벽면 세 곳을 활용해 <베토벤 프리즈>를 제작했다. 제9교향곡을 시각적으로 재편한 이 작품은 고릴라를 떠오르게 하는 괴물 ‘타이푼’과 세 딸 ‘고르곤 자매’로 시작된다. 신들조차도 제대로 물리칠 수 없는 이 괴물들을 물리쳐 달라는 듯이 두 손을 모은 여인들이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간청하고, 그의 도움으로 다시 평화로운 세계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들을 짓누르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 사랑의 입맞춤을 나눈다. 입을 맞추는 연인들을 황금 불길이 감싸고, 천사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인물의 표현에 생기가 없고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 여성의 누드가 외설적이라는 이유 등으로 비난을 받으면서 이 전시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 전시의 실패를 계기로 분리파 내부에도 갈등이 발생하고, 이후 클림트는 분리파를 떠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는 대신 스스로의 작품 세계에만 몰두하게 됐다. 이후 빈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건축가들과 화가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빈 공방’이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에 좀더 실용적인 방향으로 접근했는데, 벨기에의 미술 애호가 아돌프 슈토클레트의 의뢰로 지어진 저택은 정원, 가구, 카펫 등 대부분의 가공품들을 이곳에서 제작하면서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성공적인 통합을 이뤄냈다. 클림트의 황금빛 모자이크 벽화와 대조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기하학적 무늬의 대리석 바닥과 육중한 가구들로 장식된 식당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Max Klinger, The Statue of Beethoven, ⓒWikimedia

(게재된 글은 백영주의 '세상을 읽어내는 화가들의 수다'에 수록되었으며 저작권은 백영주에게 있고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Gustav Klimt, hope I, ⓒWikiArt / Gustav Klimt, portrait of adelebloch bauer I, ⓒWikiArt


Gustav Klimt, 제1회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 ⓒWikiArt / Gustav Klimt, Flower Garden, ⓒWik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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