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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화가의 고요한 일상 / 자화상_루벤스
  • 작성일2020/12/31 09:30
  • 조회 74
화가의 고요한 일상
자화상, 루벤스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1610, 루벤스

‘루벤스’를 처음 만난 건 20여 년 전. 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 네로가 항상 보고 싶어한 그림의 화가가 그였다. 루벤스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행복해하며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죽음을 맞는 결말을 슬쩍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좀 더 철이 들어서 자세히 본 루벤스의 그림은 약간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원래 모습보다 과장된 근육과 그림 전체에 흘러넘치는 기상은 내 개인적인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가난하고 불행한 삶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것이 무슨 공식처럼 자리 잡았지만, 루벤스는 예외다. 그는 역대 미술가 중 가장 부유했고, 아름다운 부인들과 해로했으며, 제자들이 줄을 설 만큼 유명한 화가인 동시에 기사 작위까지 얻은 외교관이었다. 6개 국어를 자연스레 구사하며 고전에 대한 지식과 깊은 교양으로 이미 귀족 대접을 받던 궁정화가였으며, 죽을 때까지 막대한 부를 누렸다. 그의 과장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인체 묘사와 밝고 과감한 색채는 그의 본질적인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인적 취향에 완벽히 맞지 않을 뿐, 루벤스가 시대를 넘어 칭송받을 만한 대가라는 것은 네로가 마지막으로 보고 감동에 젖었던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는 순간 바로 ‘헉’하고 사람을 압도하게 만드는 거대하고 꿈틀대는 인체묘사와 웅장한 기상, 한 눈에 들어오는 대각선 구도와 십자가에 매달렸음에도 당당한 예수의 모습이 그 어떤 종교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던 활력과 생기가 흘러넘치게 한다.


<중년의 자화상>, 1625, 루벤스 / <노년의 자화상>, 1639, 루벤스 / <만토바에서 온 친구들에 둘러싸인 자화상>, 루벤스



다른 그림들에서도 루벤스의 생생한 활기는 여전하지만, 자화상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평범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평소 즐겨 사용했던 과장의 미학을 자화상에서만큼은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화상 속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어, 웅장한 그의 종교화나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만큼 읽는 재미가 있다. 그는 자화상을 즐겨 그려 여러 점으로 남겼는데, 1625년의 <중년의 루벤스>는 1624년에 귀족으로 봉해진 뒤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루벤스는 화가라기보다는 귀족의 집에나 걸려 있을 듯하다. 그는 화가보다 귀족의 지위에 더 만족한 것일까?
그러나 그림 속 얼굴은 수척하고 피곤에 젖어 있다. 일상의 피로가 잔뜩 쌓인 것처럼 보인다. 예순두 살에 그린 <노년의 루벤스>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것이다. 주름진 화가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이 보이며 매우 무거운 분위기를 풍긴다. 어두운 배경과 겹쳐져 윤곽이 뚜렷하진 않지만 챙이 긴 기사 특유의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는 본인이 받은 기사 작위를 강조하는 걸로도 보인다. 당시 그가 대머리였다는 후문이 전해지는 걸로 보아 가발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른손에만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은 중풍으로 뒤틀린 손을 가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집단 초상화인 <만토바에서 온 친구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에서는 젊었을 적의 자신감과 패기를 바로 읽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흐릿하게 표현했고, 약간 뒤를 돌아보는 각도의 자기 자신은 선명하게 표현한 데서 작가의 자의식이 잘 드려난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자화상만큼 화가의 일생을 잘 표현해주는 그림이 있을까? 혼자 한껏 폼을 잡은 젊은 시절의 루벤스, 아내와 함께 있는 다정한 루벤스. 부풀고 과장된 근육과 살결이 넘나들던 선명한 그림에서 조금은 단조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그런 고요한 면에서 루벤스에게 흥미가 샘솟는다.

 


<인동덩굴 아래의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 1610 , 루벤스




(게재된 글은 백영주의 '세상을 읽어내는 화가들의 수다'에 수록되었으며 저작권은 백영주에게 있고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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