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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 《Vertical Time》

Park Jong Kyu 《Vertical Time》

  • 작가

    박종규

  • 장소

    갤러리 BK 이태원

  • 주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42길 56 (한남동)

  • 기간

    2022-04-28 ~ 2022-05-19

  • 시간

    11:00 ~ 19:00 (휴관일 : 월요일 )

  • 연락처

    02-790-7079

  • 홈페이지

    http://www.gallerybk.co.kr

  • 초대일시

  • 관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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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평론


누스피어(Noösphere)

우리나라 모더니즘 회화는 각각 프랑스의 앵포르멜(informal)이나 미국의 미니멀리즘(minimalism),  이탈리아의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 일본의 모노하(Mono-ha, もの派)와 엄격히 구분된다. 우리나라 모더니즘에서도, 그중 단색화, 혹은 물성회화라 불리는 회화의 흐름은, 형식적으로 서구사조의 자의적 재해석이라기보다, 당시 세계를 휩쓴 국제양식과 누대를 걸쳐 이루어진 우리의 미의식이 놀라 운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으로 결합한 제3의 양식이었다. 그 흐름은 조선 미의식의 수원(水源)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모더니스트 회화가들이 조선산수, 조선서예, 조선민화, 조선도자에 쏟은 애정과 자부, 그 감상과 감식의 수준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형식[所然] 이면에 있는 정신[所以然] 측면에서의 차이는 더욱 현격하다. 앵포르멜, 미니멀리즘, 아르테포베라, 모노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앵포르멜은 형상의 부정에서 나온 것이고, 미니멀리즘은 세계를 향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미니멀리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공정을 미술에 도입하려는 철학적 실험이었으며, 아르테포베라는 자연 그대로의 물질을 추구했다. 모노하는 주체와 자연대상과의 관계를 표방했다. 우리나라 모더니즘 회화는 그것을 단색화라 부르든, 물성회화로 정의하든, 과정을 숭상했다. 그림을 그 리는 과정은 그 자체로 수양이며, 수양 속에서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니라는 증험이 드러나며, 이 증험은 또다시 개인의 역사와 함께 지 극한 경지로 이양하게 된다.

박종규(J Park, 朴鍾圭, 1966-) 작가는 위에서 언급한 우리나라 모더니스트 회화의 계보를 잇는다. 박종규 작가는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 으며, 프랑스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에서 수학했다. 작가는 곽인식(郭仁植, 1919-1988)과 이강소(李康昭, 1943-), 스승 정점식(鄭點植, 1917-2009)을 존경했다. 곽인식과 정점식, 이강소 작가는 모두 새로운 창신(創新)의 경지를 추구했으며, 동시에 현대 미술가로서 가져야할 지극한 덕목을 강조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편파 때문에 오히려 전통과 단절을 요구하 며 여러 문제를 발생시키는 서구 모더니즘의 한계를, 세 사람은 선비정신과 묘합(妙合)하여 극복하고자 했다.

박종규 작가는 프랑스에서 두 명의 스승을 얻게 된다.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Surface)의 수장 끌로드 비알라(Claude Viallat, 1936-)가 있고, 브라코 디미트리에빗(Braco Dimitrijevic, 1948-)가 또 한 사람이다. 쉬포르는 회화에서의 ‘지지체’를 뜻하고, ‘표면’이라는 말인 쉬르파스는 화면을 지칭한다. 이는 회화 캔버스에 대한 혁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끌로드 비알라는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상업적 또는 회화에 개입된 신화적 요소를 부정했다. 회화를 신화화하는 서명, 제작 일자, 제목 등도 일체 포기하면서 캔버스의 중성적인 성격을 대상화한 다. 이렇듯 혁신적 태도를 지향하는 분위기에 깊이 감화받는 동시에 진정한 스승 브라코 디미트리에빗(Braco Dimitrijevic)도 만나게 된 다. 스승은 “루브르는 내 스튜디오이고 길거리는 나의 미술관이다.”라고 주장한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시민을 촬영하 고 대형 사진으로 출력하여 시내 중심부에 걸어놓는 전략으로 이미지의 신화화, 상업화를 공격했으며, 유명 미술관의 명작 회화를 일상 용품과 과일과 함께 전시하면서 미술관 제도의 권위에 일침을 날렸다. 스타, 정치인 등 유명인이나 돈 많은 자본가의 모습이 대중매체 와 함께 신화화될 때, 디미트리에빗은 무명의 시민들과 함께 제도의 권위에 도전했다. 따라서 박종규의 예술에는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 는 도전정신과 우리 전통을 향한 지극한 존중이 동거하고 있다.

박종규 작가의 회화는 형식적으로 크게 전시회 「~Kreuzen」의 연작과 2021년에 선보였던 전시회 「Vertical Time」 연작, 이번 전시회 「 Noösphere」에서 선보일 연작으로 나눌 수 있다. 독일어 ‘Kreuzen’은 중세 독일어 ‘kriuzen’에서 나왔으며 ‘십자가에 매달아 책형하다 (crucify)’라는 무시무시한 뜻을 지니는 동시에 ‘틀린 곳에 가위표를 치다(to mark with a cross)’라는 부정적 어감이 있다. 동시에 네덜란 드어 ‘kruisen’의 의미가 덧입혀져 ‘순항하다(cruise)’라는 편안한 뜻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따라서 작가는 이 단오를 통해서 시비(是非), 선악(善惡), 피차(彼此), 본말(本末)의 경지에서 중도(中道)를 결정할 수 없는 작가의 실존적 결연함을 표명했다.

영단어에 ‘아포페니아(apophenia)’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상호 관련 없는 현상 간의 연관성과 의미를 찾으려는 의식 작용”을 가 리킨다. 쏟아진 기름 자국에서 예수의 얼굴을 발견하거나 구름에서 양(羊) 모양을 그리거나 밤하늘에서 국자 모양을 찾아 북극칠성이라 부르는 우리의 심리를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무규정에서 규정을 찾고, 혼란에서 질서를 추구하는 근원적 열망이 내재하여 있다. 그림의 기원 역시 아포페니아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위벽에 동심원을 그리면 태양이 가까워져 다가올 겨울이 작년보다 춥지 않을 것이며, 절벽에 고래를 그리면 죽은 고래의 사체가 떠내려와 다가올 봄의 굶주림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믿음이 회화의 역사를 탄 생시켰다. 그래서 회화는 철학보다 종교에 가깝다. 훌륭한 예술가가 신성시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앵포르멜이나 한국의 모더 니즘 회화는 어떨까? 마음의 경지를 나타낸다는 측면에서 역시 종교적이다.

박종규 작가는 아포페니아의 심리현상이 전혀 배제된 경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그리는 행위 속에 내재된 정서, 수양, 심정, 종교성의 요 소도 지양하고 싶었다. (지양하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컴퓨터의 화면에 발생하는 노이즈에 집중했다. 플 라톤(Plato, 428?B.C.-347?B.C.)이 세계를 이데아와 현상으로 구분했고, 동중서(董仲舒, 176?B.C.-104B.C.)가 세계를 천(天)과 인(人)으로 구분했듯이, 박종규는 세계를 시그널(signal)과 노이즈(noise)로 구분한다. 정작 이 세 사람이 말하는 구분은 구분을 위한 구분이 아니라 근원적 목적을 갖는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상기시켜 현상의 불완전함을 보다 나은 쪽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보았고, 동중서는 천과 인이 하나 되어 태초의 경지로 다가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종규 작가는 시그널과 노이즈의 구분은 인간적인 가치 구분이라고 말한다. 수학 적 질서[시그널], 음악적 질서[시그널], 비례, 균제, 예측가능성, 일정함, 중정(中正)의 세계는 항상됨[常]의 세계이다. 반면에 무규칙, 범람, 혼란, 야만, 예측불가능성은 변화[變]의 세계이다. 인간적 시각으로 바라보자면 세계에 시그널과 노이즈의 대립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작 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저는 종교를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만일 신(神)이 계신다면 선악, 미추, 빈부, 귀천으로 가치를 이분하여 나누시질 않을 것 입니다. 어떠한 모종의 중(中)이라는 영원한 다이나믹한 평형상태를 견지하실 것 같습니다. 예술에서도 아름다움 자체에 지나 치게 천착하거나, 반대로 반테제로서의 혐오나 추괴를 대중 앞에 던져 아방가르드라는 분류표에 이름을 적시하여 아방가르드 예술가라 자칭하며 이득을 얻은 수많은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강제와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세계 를 보여주기 위하여 저는 시그널과 노이즈의 구분부터 지우고자 했습니다. 저는 인간세계에서 다이나믹한 평형상태를 그리고 자 했습니다. 1)

박종규 작가는 시그널과 노이즈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미시세계로 들어간다. 인체는 작게 나아가면 조직이고, 조직은 분자로 작아지며, 분자는 원자가 된다. 원자는 중성자ㆍ양성자ㆍ전자 등 아원자가 되고, 아원자는 더 나아가면 파장이 된다. 파장에서 더 나아가면 오로지 무(無)만 남게 된다. 박종규 작가는 반대로도 생각해본다. 나는 더 나아가면 사회가 되고, 사회는 국가가 되고, 국가는 대륙이 되고, 대륙 은 지구가 되며, 지구는 태양계가 되고, 태양계는 은하계가 되고, 은하계는 우주가 되고, 우주는 더 나아가면 결국 무(無)가 된다.

컴퓨터 화면은 시그널을 준다. 시그널은 정보이다. 반면에 잘못된 정보나 우리가 판독하지 못하는 양상을 가리켜 노이즈라 한다. 시그널 과 노이즈를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정교한 질서만 보이지 이분법적 분류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된다. 극단적인 본원은 인간의 아포페 니아의 심리현상도 불허한다. 오로지 다이나믹한 평형의 중(中)의 세계만 드러난다. 박종규의 화면은 이 평형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 속 에서 동심원이나 파도, 파랑(波浪), 고래, 국자를 찾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작년에 펼쳐진 전시회 「Vertical Time」은 다이나믹한 평형상 태를 맞이한 인간의 심성을 나타냈다.

박종규 작가가 이번에 제시하는 개념은 ‘Noösphere’이다. 원래 ‘noosphere’는 그리스어 ‘νόος(nous, mind, 정신)’과 ‘σφαῖρα(sphaira, sphere, 영역)의 합성어이다. 이 말은 프랑스 신학자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 최초로 사용했 다. 인간의 정신과 과학적 지식이 결합하면 인간이 사는 지층은 더 나은 곳을 향해 새로운 경지로 도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과학자이 며 예수회 신학자이자 중요한 철학자인 샤르댕 신부는 저서 ‘인간의 현상학(The Phenomenon of Man)’에서 지구의 진화를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지구의 탄생이며 이를 ‘대지 출현(geogenesis)’이라 부른다. 샤르댕 신부에 의하면, 두 번째로 ‘생태 출현(biogenesis)’ 이 시작한다. 세 번째, 인간의 발생이 시작하며 이를 ‘인류출현(anthropogenesis)이라 부른다. 네 번째, 정신 출현(noogenesis)의 시기가 온다. 이러한 정신 출현(noogenesis)의 과정은 발전을 이루어 정신(mind)이나 이성(reason)은 영혼(spirit)으로 상향되며, ‘그리스도 출현 (Christogenesis)’ 이후 신성의 충일(充溢)을 뜻하는 ‘플레로마(pleroma)’의 시기로 거듭나 인류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에 도달한 다는 주장이다. 2)

1)   2022년  3월  22일  대구시  서구  염색공단천로  작업실에서  박종규  작가와의  대담에서.
2)   Pierre Teilhard de Chardin, (New York: HarperCollins Publishers, 2008): pp. 11-27.

박종규 작가는 샤르댕 신부의 진화론적 도식을 회화에 적용한다. 처음에 현실을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예술이 있었다. 두 번째, 심리나 정서를 표현하는 예술이 등장한다. 세 번째 무언가 의미있는 형식을 추구하는 형식주의 예술이 등장한다. 네 번째, 제도(institution)가 가 치를 수여하는 제도적 예술이 등장한다. 다섯 번째, 작가는 컴퓨터ㆍ테크놀로지ㆍ철학ㆍ신학 등 궁극적 이성과 예술이 만나서 새로운 영역(noosphere)을 만드는 예술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으며, 자기 예술이, 적어도 회화의 세계에 있어서, 그러한 시대의 서막이 되리라 고 본다.

박종규 작가는 각기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둘러싸여 서로 고립된 신학ㆍ철학ㆍ과학에 예술이 다리를 놓아주지 않으면 신학ㆍ철학ㆍ과학 은 맹목을 향해 질주할 것이며, 또 신학ㆍ철학ㆍ과학 없는 예술은 허무할 것이라고 보았다. 박종규의 예술은 확실히 미시세계에 대한 통 찰에서 비롯된 것이며,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수혜를 입었다. 작가는 시그널과 노이즈의 구분을 해소할 때 영원히 다이나믹한 평형상태 로서의 알 수 없는 추동력을 직감하게 되며, 차츰 예술의 조건은 여타 이성적 활동의 맹목을 합법칙적 목적으로 인도해내는 힘에 있음 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Noösphere」 연작은 사각 프레임을 탈피한다. 왜곡되거나 변형된 프레임의 각도는 인간의 상상이나 환영에서 보았다기보다 카메라의 눈이 본 각도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0과 1이 만든 이진법의 결과이다. 0과 1로 구성된 이진법과 이진법이 진행하는 컴퓨테이선(computation)이 야말로 ‘noosphere’ 시기의 총아(寵兒)로 자리 잡았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1920-1991)는 인류의 역사가 열사(熱死, heat death)로 가는 과정이며, 인류의 의식은 마술적 의식(이미지)에서 역사적 의식(문자)으로 가다 과학적 의식(이진법)에 안착하여 결국 어리석은 부조리 (absurdity)로 가게 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이미지의 마술적 힘에 사로잡혀 현실과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문자는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문자는 알파벳 수식(alpha-numerical code)으로 발전했고 컴퓨 테이션(computation)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문자는 이미지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0과 1이 만든 이성의 이미지는 인류를 마술 적 몽매가 아니라 어리석은 부조리(absurdity)에 가둔다는 것이다. 3)

빌렘 플루서의 음울한 전망과 다르게 박종규 작가는 ‘noosphere’ 시기의 도래할 예술을 낙관적으로 본다. 마치 공자(孔子)가 입지(立志)에서 출 발해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까지의 과정을 가야 사람의 인생을 논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인류 역사와 예술의 역사가 끝까지 모험 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는 인간의 역사가 수렵(狩獵) 사회에서 후기역사(post-history)의 사회를 건너 ‘noosphere’의 시대, 즉 이성 활 동의 모든 산물과 예술 활동의 모든 산물이 결합하여 오메가포인트를 향하는 것에 예술이 추동력을 이룰 때, 예술의 존재이유가 타당하다고 본 다. 「Noösphere」 연작은 작가의 이러한 의지로 기획되었다. 이 연작은 사각 프레임의 편파로부터 멋어난 스승 클로드 비알라의 시각, 기 존체계에 항기했던 브라코 디미트리에빗의 예술적 태도, 지극한 인간사랑과 낙관적 정신을 구유했던 곽인식, 정점식, 이강소의 마음을 모두 압축한 결과이다. 창신과 인간사랑을 결합하는 능력이야말로 박종규 작가가 갖고있는 힘의 원천이며, 「Noösphere」 연작이 그것을 증험할 것이다.

 
이진명, 미술비평ㆍ미학ㆍ동양학

3)   Vilém Flusse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2): pp. 117-125.



작품이미지




01 _kreuzen, acrylic on canvas, 227.3x181.8cm, 2019



vertical time, acrylic on canvas, 193.9x130.3cm, 2021



vertical time, acrylic on canvas, 193.9x130.3cm, 2021



 vertical time, acrylic on canvas, 193.9x130.3c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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