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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표 개인전 '나르시스칸타타'

Kim Sang Pyo, "NARCISSUS CANTATA"

  • 작가

  • 장소

    갤러리 이즈

  • 주소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2-1 (관훈동)

  • 기간

    2020-03-11 ~ 2020-03-24

  • 시간

    10:00 ~ 19:00

  • 연락처

    02-736-6669

  • 홈페이지

    http://www.galleryis.com/

  • 초대일시

  • 관람료

갤러리 가기
나르시스 칸타타
NARCISSUS CANTATA
김상표


“평생에 걸쳐 자아는 거대한 리비도 저장고로서, 그로부터 대상 집중이 출현하며, 리비도는 대상으로부터 다시 그것으로 되돌아 흘러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나르시스적 리비도는 끊임없이 대상 리비도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프로이트)
 
‘화가 되기’의 나르시시즘  ˜ • 나의 리비도는 무늬와 모양이 다른 수 많은 옷들로 대상을 바꿈질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타고 흘러 넘쳐났다. 완전한 사랑을 꿈꾸며 대상을 향하던 리비도가 불가능한 사랑 때문에 위험에 빠질 때마다 애착이 강했던 것만큼 심한 반동으로 자아를 깊은 자폐의 늪 속으로 빠뜨렸다.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자폐의 끝에 섰던 자아는 ‘화가 되기’의 내용으로 변주된 나르시스 칸타타를 작곡하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수행성으로서 그리기 행위’를 반복하는 순간에는 리비도가 완전히 자아로 복귀하여 자궁의 내부에서 행복하게 고립되어 있는 상태처럼 그림을 그리게 되는 셈이다. 이때에는 리비도와 자아의 관심이 합치된 상태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져든 것이다. 내가 울면 ‘그림(자화상) 속의 그(나)’도 울고 내가 웃으면 그(나)도 따라 웃었다.
 
자화상을 통해 공백상태에 도달하기 ˜ • “제 사랑에 바쳐진 제 모습이 제 아름다움을 완전히 알도록 권하는 그곳 물을 향한 나르시스의 영원회귀에 감탄하라.”(폴 발레리) 거울 속에 비춰진 매번 다른 자기를 사랑하는 나르시스처럼 나의 리비도는 자아에 대한 무수한 기억의 결들을 대상화하여 이미지로 표현해냈다. 그 결들은 리비도가 지향했던 타자의 흔적(욕망)과 중첩되고 포개진다. 그런데 나를 그리면서 점점 자유로워져 간다는 것은 내 안의 타자의 흔적(욕망)을 지워가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수행성으로서 그리기 행위’는 라캉이 말하는 일종의 ‘공백의 장소’로 나를 데려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 장소가 텅빈 허무의 공백이 아닌 텅빈 충만의 공백이 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욕망 ˜ • 공백의 장소에서 우리는 그 무엇도 새롭게 욕망할 수 있다. 그 장소가 텅빈 허무의 공백으로 느겨지면 자아는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을 탐닉할 것이다. 오직 텅빈 충만이 되었을 경우에만 자아는 형이상학적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가 만족시키는 허기 우리가 해소하는 갈증, 우리가 가라앉히는 감각 바깥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은 만족 없는 욕망으로서 타자의 타자성과 외재성에 귀를 기울인다. 다시 말해 이해관계에 찌든 욕망에서 벗어나 텅빈 충만 속에서 낯설고 약한 타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것, 그것이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참된 삶은 부재한다. •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 레비나스의 저작 ‘전체성과 무한’의 첫 구절이다. 이 구절을 처음 마주했을 때 기차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두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의 허망함에 빠져있을 때였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던 기존의 삶에서 일탈하여 새롭게 창조한 ‘화가 되기’조차도 주체와 동일성의 그늘에 놓여 있는 나르시스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이 찾아들었다. 그 일을 겪은 얼마 뒤 모심과 살림의 정신으로 한살림운동을 펼쳤던 무위당 장일순이 형이상학적 욕망에 다가가는 삶을 살았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기록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그의 삶을 초상화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예술가는 시대의 전위로서 살아야 한다는 나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나르시시즘을 벗어날 수 있을까? ˜ • 레비나스는 우리가 친숙한 이들이 아닌 낯선 타인, 그 중에서도 약자에 대한 맞아들임을 욕망하기를 기대하지만, 나약한 존재자인 나는 먼저 아내와 딸 아이에서부터 동일화하지 않고 타자로 영접하는 것을 배워가야만 한다. 딸 아이는 참 많이 나를 닮았다. 그래서인지 딸 아이를 그리면서 나를 그린다는 착각에 빠졌고 내 안의 자유를 향한 몸짓을 대리해서 표현했다. 들여다 보면, 딸 아이의 얼굴은 자화상의 확장에 다름 아니었다. 무위당 장일순을 그리면서도 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의 기대를 그에게 기대어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나르시시즘과 타자성은 서로 분리될 수 있을까? 모든 욕망은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해서 나르시시즘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리비도의 원천과 기원이 자아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
 
구원의 눈물  ˜•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레비나스의 이 구절을 보고 흘러내린 내 눈물이, 절대적 타자성을 향해 자신을 열어젖히는 찢어짐의 순간에 발생했기를 바란다. 딸 아이가 나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늘상 내 손 밖으로 미끄러져가는 타자성을 드러내는 것을 아빠로서 위험하게 바라보던 것에서 벗어나, ‘화가 되기’의 과정에서는 딸 아이의 타자성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무위당 장일순의 모심과 살림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수행성으로서 그리기 행위’로 끌어들여 해체된 인간의 얼굴 위로 수많은 새로운 생명들이 피어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내 스스로에게 기대한다. 내 그림이 분리된 유한자가 절대적 타자성을 품어 안고 쏟아내는 구원의 눈물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나르시스 칸타타’로서 음악처럼 향유되었으면 좋겠다. 나르시시즘과 절대적 타자성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는, 不二의 나르시스 칸타타.
 
“나의 눈이여, 너의 수문을 열어라, 그리고 너의 가장 고귀한 능력을 실행하라, 다른 눈들도 또한 볼 수 있고 잠들 수 있지만 오직 인간적인 눈만이 울 수 있나니. 그리하여 너의 물줄기로 너의 샘을 덮어 버리도록 하라, 눈과 눈물이 하나될 때까지, 그리고 각자는 다른 것의 차이를 간직한 채, 눈물을 흘리는 눈과 보는 눈물로서.”(앤드류 마블)
 

동일성의 거울을 깨고 그 파편들을 가로질러 절대적 타자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기를 ….. 지식이나 인식의 차원을 넘어선 구원의 눈물 없이는 불가능하리라. Amor Fati
 


김상표_Nirvana-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8




김상표_김명주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8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8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8




김상표_혁명가의 초상-무위당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8



김상표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9



김상표_김신현_캔버스에 유채_145.5×89.4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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