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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선 《밥알이 살아있다》

Lee Ye-sun, solo exhibition 《Rice is alive》

  • 작가

    이예선

  • 장소

    가모갤러리

  •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96-1 (삼청동)

  • 기간

    2022-03-29 ~ 2022-04-10

  • 시간

    10:00 ~ 18:00

  • 연락처

    02-733-6178

  • 홈페이지

    https://blog.naver.com/gamogallery8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갤러리 가기

이예선, 휴먼 헤리티지, 160x117cm, 캔버스에 밥알, 2021



“만만(萬滿)한 밥”展 앞에
 
생애주기가 고작 며칠인 밥은
참으로 만만하기 짝이 없다.
 
작가의 손에서 분비되는 미량의 분비물을
혼합하여 인간의 진짜 DNA를 심어 붙인다.
 
밥알인의 안녕과 영생이 만세까지 차고 넘치라고 기원하면서..





작가노트

어떻게 밥으로 작품을 하실 생각을 하셨어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외부환경이 주는 동기가 없이도 스스로 도출할 수 있는 내재력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의 굳어진 결정(結晶)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깝고 흔해서 소홀했던 공기나 물처럼, 밥은 오죽하면 '만만한 밥'외로는 다른 용도가 되지 못했을까.
그러나 작가는 허기진 식욕에 가리워진 미미한 밥의 실존에서 두 가지 메세지를 발견하고 주목한다.
 
왕도 평민도 노비도 밥을 먹는다.
인간의 길흉화복 순간마다 공헌했던 탈 계급적 존재론과 생명사상이 바로 밥의 혼이다.
 
밥의 메세지 하나는 평등사상이다.
 
수 천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 사람의 뼈는 밥이라는 DNA를 번식하라는 유언이 된 것일까.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 붙이면서 흙으로 사람을 빚은 조물주의 심정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가의 손에서 분출된 미량의 분비물과 섞어진 밥알사람에게 작가의 DNA를 밀접하게 나눠주고 안녕과 건강을 염원하며 세상에 내보내는 소명을 한다.
밥알은 계속 살아서 번식해야 한다고 말이다.
 
밥의 메세지 두 번째는 세대의 순환성이다.
 
'내가 만만한 밥'이었다면 이제 다시 천명한다.
'나는 만만(滿萬)한 밥'이 될 것이다.
 



이예선, 휴먼 헤리티지, 95x77cm, 혼합매체에 밥알, 2022


역사를 색깔로 표현한다면
어떤 색깔이 될까
 
내가 생각하는 역사라는 색은
반다이크브라운(Vandyke Brown)이었다.
 
엄마의 버선장이 그랬고
큰 집의 오래된 뒤주가 그랬고
한옥의 서까래가, 쌀 씻는 이남박이 그랬다.
 
그 위에 1757명의 사람을 세워놓고
최초부터 집단을 형성했던 인간을 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인간들
또는 더러 문장의 쉼표처럼 끊어진 인간들..
도도하고 묵직하게 전진하는 역사처럼.
 
그리고 휴먼헤리티지 사이로
북두칠성 일곱 개의 별이
상서로운 기운을 담은 황금인간 메신저로
미래의 희망까지도
어둠 속에 레이저 지시봉처럼
광채를 띠며 제시하고 있다.
 



이예선 금수저를 낳다 (1~3) 혼합매체에 밥알 2021


작가약력

출생
대한민국 서울출생 Seoul, Korea, b. 1964~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장식미술학과 졸업
 
개인전 / SOLO EXHIBITION
2022, "밥알이 살아있다 展", 가모갤러리, 서울, 한국
2021, "Human Heritage 展", 갤러리 메타캔버스,서울, 한국
2020, "밥알이 살아있다 展", 갤러리 열하루,서울 ,한국
2019, "밥알이 살아있다 展", 아산병원 갤러리, 서울, 한국
2019, "밥알이 살아있다 展, 하이서울유스호스텔, 서울, 한국
2018, "밥알이 살아있다 展", 연홍미술관, 고흥, 한국
2018, "밥알이 살아있다 展", AP갤러리, 서울, 한국
2018, "밥알이 살아있다 展", 다솜 갤러리, 서울, 한국
2016, "밥알이 살아있다 展, 토비아스 갤러리,서울, 한국
2015, "밥알이 살아있다 展", 갤러리 오후엔, 인천, 한국
2014, "밥알이 살아있다 展", SMAF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 한국
2012, "WHITE & WHITE 展", 스튜디오 원, 서울, 한국
1995, "선으로 긋다 展", 한터문화센터, 서울, 한국
 
아트페어 및 단체전 / ART FAIR
2022, 화랑미술제, SETEC, 강남,서울
2022, '자유정신전' 갤러리 버금, 제주,한국
2022, 늘푸른예인전, 갤러리 이즈, 서울
2021, 제1회 강남3구 미술인 연합전, 지상전, 한국
2021,이화여자대학교 녹미전, 지상전,서울,한국
2021, KIAF, 코엑스,강남, 서울
2021, 제21회 한성백제문화제 대백제전, 송파, 서울
2021, 인사동사람들전 '행복나눔전', 갤러리 라메르, 서울, 한국
2021, 송파미술협회 정기전 '극복21' ONLINE VIEWINGROOM, 서울, 한국
2021, BEYOND THE DARKNESS, K&P Gallery, New York, USA
2021, SPREAD SPIRIT OF LIBERAL, 아트디오션갤러리, 여수, 한국
2021, 화랑미술제,COEX, 강남, 서울
2021, 한국미술협회 서울지회전, 인사아트프라자,서울,한국
2020, 송파여류작가 회원전, 지상전, 서울
2020, 자유정신을 전파하다, Gallery MOON101, 대구, 한국
2020, KIAF, ONLINE VIEWING ROOM, 한국외 11개국
2020, 한성백제송파미술제, 지상전, 서울
2020, HOMETABLEDECOFAIR,수원컨벤션센터, 수원, 한국
2020, 늘푸른예인회 사이버미술전, 남산도서관, 서울 한국
2020, 화랑미술제, Coex, 서울, 한국
2019, KIAF, 코엑스, 서울, 한국
2019, 화랑미술제, Coex, 서울, 한국
2019, 송파미술협회 정기전, 예송미술관,서울, 한국
2019, 늘푸른예인회 정기전, 남산도서관, 서울, 한국
2019, 자유정신을 전파하다, UHM 갤러리, 서울, 한국
2018, 연홍 드로잉전, 연홍미술관, 고흥,한국
2018, 아트 카오슝, 카오슝, Taiwan
2018, 송파미술협회 정기전 예송미술관, 서울, 한국
2018, AHAF 아시아호텔아트페어 그랜드인터콘티넨탈,서울, 한국
2018, ”100인 100전“, 현대백화점 목동점, 서울
2018, 일상의 예술-오브제, 뮤지엄 산, 원주, 한국
2018, 화랑미술제, Coex, 서울, 한국
2017, 서울아트쇼, 코엑스, 서울, 한국
2017, 늘푸른예인회전, 뚝섬전망문화콤플렉스, 서울, 한국
2017, 핑크아트페어 코엑스인터콘티넨탈, 서울, 한국
2016, SOAF, 코엑스, 서울, 한국
2016, 행복에세이전, 대안공간 눈, 경기, 한국
2015, 서울아트쇼, Coex, 서울, 한국
2015, 나혜석 미술대전, 수원미술관, 경기, 한국
2014, 서울아트쇼, Coex, 서울, 한국
2014, 대한민국 선정작가전, 한전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4, 아트 아일랜드전, 인사가나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4, 싱가폴 뱅크아트페어, Pan Pacific Hotel, Singapore
2014, 홍콩 컨템포러리 아트페어, Excelsior Hotel, Hongkong
2013, 대한민국 여성미술대전, 한국미술관, 서울, 한국
2013, 현대미술 작은그림축전, 글로벌갤러리, 서울, 한국
2013, 늘푸른예인전, 구리아트홀, 경기, 한국
2013, 대한민국회화대전, 시립경희궁미술관, 서울, 한국
2012, 대한민국 회화대전, 한국미술관, 서울, 한국
2012, 터키 모던아트페스타, 한국미술관, 서울, 한국
2011, 늘푸른예인전, 강동아트센터, 서울, 한국- 이하 생략
 
수상 / PRIZE
대한민국 여성미술대전 은상
대한민국 회화대전 특선
대한민국 선정작가(미술과 비평)
글로벌 작은그림축전 고흐상
대한민국 회화대전 입선
나혜석 미술대전 입선 및 다수
 
소속 / ART ASSOCIATION
한국미술협회, 송파미술협회, 늘푸른예인회, 이대녹미회
 
매스컴 / MASS MEDIA
KBS 뉴스(서울, 광주,순천,고흥)
KBC광주방송,전남일보, 네이버뉴스, 뉴스타운, 무등일보, 뉴스메이커
프레시안, 광남일보, YTN 사이언스
 
유투브/ 이예선/ 밥알이 살아있다
인터넷 방송 아트코리아 <이예선초대전>
2020 화랑미술제official promotion video-NA gallery
2020 화랑미술제 VIP오프닝은 뭐가 다른가-GONGSHALL TV

드라마 협찬 / DRAMA SPONSORSHIP
KBS 우리가 만난 기적 2018
 



이예선 길 90.9x72.7cm 캔버스에 밥알 2020


평론 1

 
생명의 밥알 - ‘살아 있음’의 발랄한 현현
김성호(Kim, Sung-Ho, 미술평론가)
 

I. 짓는 밥 - 삶에서 길어 올린 밥알 조형

인류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의식주! 우리는 그것을 영위하는 행위를 ‘짓다’라는 동사로 표현한다.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 행위’는, 매슬로(A. H. Maslow)의 인간 욕구의 5단계 이론을 빗대어 볼 때, 가장 기초적인 1단계의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식주를 재화를 통해 해결하는 시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식(食)’은 직접 요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衣)와 주(住)가 매슬로 이론에서 2단계의 ‘안전 욕구(safety needs)’와 3단계의 ‘사랑과 소속 욕구(love & belonging)’마저 공유한다면, 그것에 비해, 식(食)은 1단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에 머무른다고 볼 수 있겠다.

작가 이예선은 밥을 짓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진 밥알을 재료로 해서 자신의 예술 활동을 펼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매슬로 이론의 5단계인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를 유감없이 실현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밥 짓기를 거쳐 밥알로 무엇인가 만드는 작가 이예선의 조형 세계’를 ‘가장 기초적인 1단계의 생리 욕구로부터 발원해서 가장 이상적인 5단계의 자아실현 욕구에 이르는 작업’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달리 말해 그녀의 작업은 ‘삶의 심층으로부터 견인하는 생명 예술’, 혹은 ‘삶에서 길어 올린 밥알 조형’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 이예선은 왜 밥알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대식구에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 어머니께서는 반찬이라고 할 만한 반찬을 상에 올리지 못한 민망한 심정을 그저 밥으로 대신하셨다. 밥알이 살아 있네. 밥이 아주 잘됐어, 어린 나는 밥알이 한 톨씩 일어서서 움직이는 상상을 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매일 먹는 밥을 보면서 ‘그래, 밥알을 일으켜 살려 보자’라고 생각했다.”

옛말에 ‘밥이 보약’이라고 했던가? 밥이 삶을 지속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임을 체득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소환한 그녀의 밥알로 만든 조형 작업은 이처럼 ‘살아 있음’에 주목한다. 자신을 ‘밥알 작가(rice artist)’로 자처하는 이예선에게 있어 밥 짓기로 만든 밥알, 그것도 점성(粘性) 가득한 밥알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재료이다. 딱딱하지 않고 습기를 먹어 ‘차지고 끈끈한’ 밥알! 인류는 어떻게 타작(打作)으로 골라낸 생곡 (生穀)의 쌀을 이러한 점성을 함유한 밥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건조하고 딱딱한 곡식을 온기와 습기를 먹은 차진 밥으로 변화시켜 먹기 좋게 하기 위해서일 게다. 이렇게 쌀의 물성을 밥으로 변화시키기까지 물, 불, 공기는 필수적이다. 쌀을 씻고 불려 밥을 안치는데 필요한 물, 그리고 밥물을 끓이고 뜸을 들이는데 필요한 솥 외부의 불과 솥 내부의 공기, 마지막으로 주걱으로 다 된 밥을 뒤섞어 풀 때 혼성되는 공기층이 그것이다. 갓 지은 밥이 함유한 특유의 점성, 즉 “쌀의 전분이 화학 작용을 거쳐 소화하기 좋은 촉촉한 알파 전분의 상태로 변화하는 호화(糊化) 현상”은 이러한 물, 불, 공기의 3중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확보되는 밥알의 점성은 작가 이예선이 자신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녀의 작업에서 밥알의 점성이란 ‘살아 있음’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하는데 있어 제격이기 때문이다.


II. 살아 있는 밥알 - 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

작가 이예선은 지금까지의 개인전 주제를 “밥알이 살아 있다(rice is alive)”로 제시해 왔다. ‘밥알이다’라고 하는 ‘~이다’로서의 ‘본질존재(essentia)’가 아닌 ‘밥알이 있다’라고 하는 ‘~이 있다’는 ‘현실존재(existentia)’의 의미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전시 주제는 ‘실존주의 (exsistentialímus)’ 개념을 가시화한다. 특히 ‘밥알이 살아 있다’라고 하는 ‘~이 살아 있다’ 는 ‘~이 있다’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인간 실존주의’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더욱이 그녀가 밥알을 하나하나 붙여 가며 사람들을 만드는 작품을 먼저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에 있어 밥알이 구축하는 ‘인간 실존주의’라는 화두는 의미심장한 차원마저 지닌다. 주지하듯이, 실존주의는 19세기 합리주의적 관념론과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독일과 프랑스를중심으로 일어난 철학으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지칭한다. 실존주의가 바라보는 인간이란, 자신의 몸이 이 세계에 내던져진 기투(企投)의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채 불안의 상태로 이 세계에 유기되어 있는 인간, 그래서 늘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로서 선택의 갈림길을 결정해야만 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창조하도록 운명지어진 개인 주체로서의 인간과 같은 것이다. 대개 19세기 키에르케고르(Söen Aabye Kierkegaard)의 사유로부터 기원하는 이러한 실존주의는 불안, 선택, 단독자로서의 개인 주체의 개념이 강조된다. 키에르케고르의 이러한 개념을 잇는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한계상황(Grenzsituation)은 실존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일깨운다. 죽음, 싸움, 고뇌, 번민, 죄악 등 실존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직시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로서의 개인 주체는 이제 야스퍼스의 나(우리)와 관계하는 너(당신들), 그(들), 그(녀)들 사이의 실존적 소통을 요청한다. 작가 이예선이 밥알로 만드는 인간은 대개 복수로서의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로 표현될 만한 인간 군상은 야스퍼스의 ‘인간 주체 간 실존적 교제’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세계-내-존재’라고 하는 실존주의적 개념을 소환하기에 족하다.

작품을 살펴보자. 캔버스천이나 삼베천 혹은 패널 위에 밥알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얼굴과 팔 다리가 있는 형상이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제스처를 하고 있다. “하루에 30g씩 초밥 한 덩어리 분량의 새로 지은 밥”으로 “매일 조물주가 되어” 점성의 밥알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만든 사람(들)은 작가의 언급대로, “마치 어머니의 출산처럼 고되게 만들어진” 것이다. 고단한 창작의 노동을 거쳐 탄생한 작가 이예선의 피조물인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형상을 띠면서 ‘~이다’라고 하는 보편적 인간의 ‘본질존재’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이 있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현실존재’를 극대화한다. 이러한 실존적 인간상의 차원에서 갓 지은 밥이 만든 하얀 ‘밥알 몸’이나 뜸을 오래들여 누룽지처럼 만들어진 누런 ‘밥알 몸’ 그리고 흑미로 지어 만든 검은 ‘밥알 몸’과 같은 다양한 밥알의 변주(變奏) 양상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뿐인가? 필요에 따라 작가는 밥알 몸에 색을 칠해서 자연색 위에 인공색을 추가하기도 한다. 각기 다른 주제에 따라 때로는 노란색이나 황금색의 인물로, 더러는 녹슨 듯 푸른색의 인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피조물들은 작품 〈금쪽같은 장병들- 내 아들아〉에서 보듯이 제목에 걸맞게 금색의 인물상으로, 작품 〈나는 자연인(人)이다〉는 제목에 부합하게 흙색과 같은 인물상으로. 〈제주 토르소〉 연작은 제목처럼 검푸른 현무암 색의 인물상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저마다 각기 다른 포즈로 꿈틀거리는 인간 군상은 마치 한 장소에 모인 실제의 군중 모습처럼 다양하다. 특히 작품 〈춘화도, 진화란 없다〉 연작에서 우리는 다양한 포즈로 사랑에 열중하고 있는 수많은 연인들을 목도한다. 게다가 작가 이예선은 군상을 때론 한 장소에 몰려있게 하거나 흩어져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길처럼 보이는 장소에 군상을 비우기도 하면서 개성 없어 보이는 작은 인물상에 생명의 옷과 더불어 다양한 개성의 옷을 입힌다. 이처럼 각기 다른 색과 재질의 밥알 몸이 만든 다양한 인간 형상에서 우리는 ‘사회적 인간상’ 즉, 하이데거 식의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키에르케고르의 불안과 싸우는 인간,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속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가히 살아 있는 밥알이 만든 ‘실존주의 인간 상의 발현’이라고 하겠다.
 
III. 생명을 품은 ‘밥알 몸/정신’

작가 이예선의 밥알 작업에서 실존주의 철학과 개념보다 더 주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생명이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밥의 지독한 DNA를 신뢰한다. 산자와 망자(제삿밥)에게 독점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밥! 너의 정체는 무엇이나. 혈연보다 끈끈한 관습의 제물, 관습의 공동체, 밥은 이미 생존의 역할을 포함한 포괄적 의식이다. 사람이 소우주라고 하니 밥은 생명이었는가 보다.” 작가노트의 발언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작업이 생명과 관계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보라! 이예선이 끈적거리는 점성을 지닌 밥알을 하나하나 붙여가며 이른바 ‘밥알 몸’으로 된 사람을 만들어 나갈 때, 팔다리를 지닌 인간 형상은 이내 ‘밥알 정신’을 담은 사람으로 변환되어 간다. 몸과 정신이 어우러진 ‘밥알 몸/정신’은 실존주의를 아우르며 그것을 넘어선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유명한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언명에서 우리는 현실계 속 개별적 인간 주체의 실존을 확인하지만, 이예선이 추구하는 ‘밥알 몸/정신’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소통에 보다 더 주목한다. 얼추 본다면,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친 베르그송(Henri Bergson)이나 니체(F. W. Nietzsche)의 생철학적 개념과 더 닮아 있는 셈이다. 아서라! 그러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어떻게 현대의 예술가의 직관을 중시하는 복잡다기한 사유와 딱 맞물릴 수가 있을까. 실존주의와 생철학은 다만 작가 이예선의 ‘밥’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주의 사유를 이해하는 기초적 바탕이 될 따름이다. 피조물의 몸과 정신을 따로 나눌 것 없는 작가 이예선의 ‘밥알 몸/정신’은 그녀의 평면의 지지대 위에 올라선 사람들 연작뿐 아니라, 다양한 오브제 작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따스하게 갓 지은 밥의 밥알로 부조 형태의 사람을 만들거나 커다란 환조의 형상을 만들 때도, 또
밥공기, 화분, 주발 등 부조로 만든 ‘그릇 형상’ 안에 밥알로 만들어진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담고 있을 때도 나아가 누군가 쓰다 버린 ‘발견된 오브제’를 작품 속에 끌어 들여 밥알로 된 ‘만들어진 오브제’와 혼성해서 디오라마(Diorama)처럼 연극적 장치를 구현할 때도, 생명의 밥 정신은 곳곳에 드러난다. 밥알을 짓이겨 만든 소위 ‘밥알 타일(rice tile)’을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만든 모듈을 통해서 마치 색색의 모자이크화처럼 꾸민 다양한 부조형 회화 작업들은 또 어떠한가? 〈책 읽는 소녀〉뿐 아니라 만국기 작품 〈세계를 데려오다〉, 풍경화 작품 〈연못을 데려오다〉 등에서도 생명은 여실히 안착해 있다. 밥알을 짓이겨 꽃잎 하나하나를 이어 붙여 커다란 장미 화환을 만든 〈Rouge〉 연작이나 수많은 드로잉과 영수증을 모아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신작 실험에서도 이러한 생명 의식은 잠재해 있다. 그녀가 밥알 회화와 함께 천착하고 있는 오브제 작업에 대해서 ‘마저 죽지 못한 생명과 물건’에 대한 관심이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말이다.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녀가 갓 지은 밥이 지닌 온기와 점성 가득한 밥알로 작품을 완성한후에 시신에 염(殮)을 하듯이 ‘밥알 몸/정신’의 피부 위에 코팅을 해서 공기를 차단하고 상하지 않게 박제하듯이 되살려 내는 조형 과정에 대해서 말이다. 최종 결과물에 이르게 하는 창작의 완성인 이 과정은 ‘죽음이 아닌 생명’이라는 작가가 지향하는 생명 의식을 고스란히 품
어 안는다. 글을 마무리하자. 작가 이예선의 생명 의식은 거창하지 않다. 현실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자아 성찰이 혼성된 생명 의식은 때론 잔잔하게 때론 유머와 해학이 뒤섞인 채로 ‘살아 있음’의 의미를 되새긴다. 가히 생명을 품은 밥알 몸/정신’의 ‘살아 있음의변주’이자 발랄한 현현(顯現)이라고 할 만하다. ●
 





이예선 휴먼 헤리티지-Brown 58x59cm 혼합매체에 밥알 2021



평론 ⅱ


이예선의 조형세계
‘밥알’이 만들어내는 신조형의 세계
 
신항섭(미술평론가)
 

미술에서 재료는 조형적인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조형적인 결과물은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맞는 조형언어 및 어법이 강구됨으로써 그 재료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이미지 또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러고 보면 창작을 전제로 하는 미술에서 새로운 재료의 개발은 독자적인 조형세계, 즉 개별적인 형식을 성립시키는 요건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새로운 재료의 개발은 창작행위 그 자체에 필적하는 중요한 조형적인 요건인 셈이다.
이예선은 쌀을 익힌 밥알이라는 일상적인 주식 재료를 사용해 작업하는 독특한 표현방법을 창안해냈다. 밥알이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다운 상상력의 소산이다. 이처럼 특이한 발상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작가정신이 불러들인 행운일 수 있다. 밥알이 뭉쳐져 형태가 되고 그 형태가 인물상이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조형, 즉 입체적인 형태를 다루는 전통적인 조각의 경우는 흙이나 돌, 나무, 동, 철 등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다가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다양한 공업적인 재료를 이용하게 됨으로써 보다 광범위한 조형세계의 진보를 촉진하게 되었다. 현대조각에서 재료에 관한 금기사항은 없다. 그래서일까. 밥알이라는 식재료가 조형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밥알이라는 재료의 출현은 일련의 전통적인 조형작업과는 판이하게 다른 조형미를 보장한다. 쌀알을 익힌 밥알이 극미한 조각의 재료가 되어 소조와 거의 동일한 조형방식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밥알이라는 재료는 수천 년을 소급한다. 밥알의 원형인 쌀 즉, 벼가 인류의 주식이 된 것은 수렵중심의 삶에서 특정 지역에 정착하게 된 농경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치자면 수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알이 되며, 밥알이 조형적인 재료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진화의 과정일 수도 있다. 벼의 진화가 종내는 예술적인 조형물로 귀착하니, 밥알이 또 다른 미술장르의 원형이자 시작이 되는 셈이다.
소조작업은 흙으로 이루어진다. 점질이 좋은 흙이 형태를 만드는데 적합하여 조형의 재료가 되었듯이 밥알 또한 점질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조형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다만 밥알은 그 크기나 물리적인 특성이 말해주듯이 대형 조각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다. 무엇보다도 밥알로 형태를 만들었을 때 그 재질이 가지고 있는 특성, 즉 수분이 빠지면 수축한다든가 자연적인 균열 등의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고정적인 형태를 전제로 하는 입체작업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밥알을 뭉쳐 형태를 만드는 작업과정 이후에 오는 물리적 변화는 대형작품에는 제약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밥알은 진흙과 달리 아주 세심하고 정밀한 작업방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극히 작은 크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소조작업이 따를 수 없는 표현영역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밥알은 불과 1-2cm 크기의 인물상으로 바뀐다.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로 요약되는 인간의 모양을 기본단위로 하는 인물상은 최소한의 형태에 그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물상이 단독 또는 군집을 이루면서 다양한 구성의 평면 및 입체 공간을 장식한다. 가장 단순하고 작은 형태의 인물상이 모여 스토리가 되고 조형적인 변주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가 <밥알매듭>이라고 이름 붙인 입체작업은 머리와 팔과 다리를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끈으로 이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처럼 보인다. 밥알매듭에서 인간 형상을 찾았다면 인물에 대한 더 이상의 단순화는 없다. 인물 형상을 못 본 상태에서도 감상자에 따라서는 밥알매듭을 인물의 형상으로 착각할 소지가 있으니, 이는 극단의 단순화임과 동시에 의인화이다. 그의 ‘밥알 조형’이 ‘살아 있는’ 이미지로 착각하게 할 만큼 생동감 표현에 탁월하다는 의미일 터이다.
수많은 인물상이 등장하는 작품에서 개개의 인물의 형상은 최소의 단위가 된다. 인물 형상 하나하나는 평면적인 공간, 즉 캔버스 위에서 이합집산하며 독특한 조형공간을 연출한다. 모양이 저마다 다른 수백 수천의 인물상 하나하나는 독립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전체상에서는 일부로 귀속된다. 가령 <길>, <인간세상으로> 등 갈색조의 캔버스 위에 나열되는 수많은 흰색의 인물들이 군집을 이루는 평면작업의 경우 인물상은 풍경의 일부가 될 따름이다. 하얀 인물군상이 이합집산하면서 십자가 또는 추상적인 이미지의 실루엣을 남기는 장면을 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동적인 존재로서의 인물상들이 존재하는 방식, 즉 어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이렇듯이 밥알 인물상은 작업의 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특정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필요한 보조적인 또는 소재로서의 역할에 그치기도 한다. <바람에 날아간다>의 경우 바람에 휘어지는 꽃가지를 회화적으로 묘사한 뒤, 인물상은 꽃가지라는 이미지를 거드는 소재로 배치된다. 이를 통해 밥알로 만든 인물상이 가지고 있는 범용성을 간파할 수 있다. 개체독립 작품으로서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는 할지라도 군집을 이루었을 때 또 다른 의미로 가치가 변환하기에 그렇다.
이처럼 다양한 조형적인 관점을 수용하는 존재로서의 인물상일지언정 ‘밥알’의 영역을 탈피하지 못한다. 밥알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조형적인 상상력이 ‘밥알’을 사역하는 주체가 되는 까닭이다. 그는 조형적인 상상력을 자유롭게 작동하면서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조형의 외연을 확장해나간다. 지난 10여 년간 작업을 보면 그 상상력이 얼마나 폭넓고 기발한지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폐기물을 모아다가 밥알을 개입시켜 버려진 것 또는 오래된 것에 담긴 시간성과 역사성을 환기시킨다. 또한 밥알을 으깨어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초상화 양식의 인물 부조와 소조작업 위에 밥알을 덮어씌우는 인물 두상은 등신대 크기에 가깝다. 소조작업의 원형을 이용하는 것은 밥알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특성, 즉 갈라지거나 터지는 등의 변화로 인해 소조처럼 전체를 밥알로 빚을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런가 하면 밥알은 국기가 되기도 하고 장미꽃이 되는가 하면, 때로는 남녀 성기가 되기도 한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조형적인 상상력이야말로 만능의 변장술을 가능케 한다. 밥알이 크게 뭉쳐지면 조각의 개념을 충족시키는 인물상이 된다. 반면에 축소시키면 오브제가 된다. 소형의 입체작업이나 설치작업도 병행하는데, 여기에서는 오브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밥알은 점질의 재료적인 특성으로 인해 구태여 인물상이 아니더라도 무한한 변신이 가능한 조형적인 재료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변환 또는 변주를 통해 밥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어쩌면 1-2cm 크기의 인물상의 경우, 밥알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형태변형을 통해 생물과 같은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지 모른다. 잘 지어놓은 밥을 보며 어머니가 말하시곤 하던 ‘밥알이 살아 있다’는 말은 ‘잘 지어진 밥’이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그는 생물로서의 개념에 합치되는 인간의 모습을 착안하게 되었다. ‘살아 있는 밥’이 살아 있는 생물체로서의 인간의 형상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은 인물상은 단순히 조형의 개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얻는다.
실제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물, 또는 최소 단위로서의 인물이 캔버스 위에 놓일 때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작은 인물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듯싶은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밥그릇에 그득하게 쌓아 놓은 작품에서도 인물상은 ‘살아 있는’ 느낌이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아주 조그만, 밥알로 빚은 인물상이 움직이는 듯싶은 시각적인 이미지야말로 ‘밥알 조형’이 가지고 있는 요술이다.
다양한 작업 가운데 초상화 양식의 인물상이라든가 장미꽃을 무수히 모아놓은 작품은 기존의 조각개념에 근사하다. 부조라든가 환조의 조형개념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의 상징인 국기를 캔버스에 가득히 배열한 작품은 평면회화에 가깝다. 밥알로 만든 정사각형의 픽셀 또는 그리드 같은 이미지의 오브제를 캔버스 위에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개념의 회화적인 조형공간을 창출한다. 만국기 또는 특정 국가의 국기만으로 만든 작품은 평면과 입체로서의 경계에 놓인다.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타이완 같은 특정 국가의 국기 이미지만을 채용한 작품들이 있는데 이는 전시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초상화 양식의 인물상을 비롯하여 장미꽃 그리고 국기의 이미지를 채용한 작업에서는 개별적인 형식미의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특히 만국기 또는 특정 국가의 국기를 채용한 작품은 1cm 정도의 정방형의 동일한 픽셀을 화면 전체에 채우는 전면회화 방식을 따르는데 연속적인 이미지의 나열에서 미적 질서를 발견한다. 무한반복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심미표현의 하나이다. 현대미학의 공로이기도 한 동일한 이미지의 무한반복과 질서는 탐미적인 시각을 유혹한다. 이들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될 때 개별적인 형식미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꽃을 사실적으로 만들어 화면을 빈틈없이 빼곡히 채운 일련의 작품들은 도저히 밥알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술적인 완성도가 뛰어나다. 기술적인 정교함은 실제의 장미로 착각할 정도인데, 공력과 인내심 그리고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들 작업은 평면과 입체의 경계가 모호하여 작업에 대한 정확한 명칭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형개념이 필요하다. 오브제를 사용한 평면회화에 가까우면서도 그 세부를 들여다보면 입체로서의 성향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캔버스라는 평면적인 공간에 놓이는 존재방식임에도 오브제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보면 입체적이다.
밥알은 수분과 점질의 탄수화물 중심의 영양성분을 가지고 있으나 건조하게 되면 차돌처럼 견고하게 굳는 성질로 인해 조형작업이 가능하다. 물론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 맡겨진 문제이다. ‘밥알 조형’에서 생산되는 미술로서의 가치란 모두가 처음으로 성립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밥알 조형’의 창안자이자 창시자인 그가 모의하는 조형세계의 범주를 현시점에서는 정의할 수 없다. 이 순간에도 부단히 자기진화를 획책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예선 Mother Nature(대자연) 40.5x32cm 캔버스에 밥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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