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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 우병윤 《숨결; 스미는 숨, 맞닿은 결》

Kim Gyu, Woo Byoung-gyun

  • 작가

    김규 우병윤

  • 장소

    라흰갤러리

  • 주소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50길 38-7 (용산동3가)

  • 기간

    2022-03-17 ~ 2022-05-07

  • 시간

    11:00 ~ 18:00 (휴관일 : 월요일 휴무 / 일요일 예약제 (오후2~6시, 전날 마감))

  • 연락처

    02-534-2033

  • 홈페이지

    http://laheen.art

  • 초대일시

  • 관람료

갤러리 가기
● 장르를 초월하여 조응하는 한국적인 조형 언어와 예술 정신을 고찰
● 김규 작가: ‘신목기시대’를 상상하며 나무의 벌어진 틈이나 균열, 여백으로부터 순리에 맞는 아름다움과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역설
● 우병윤 작가: 석고와 물감이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작업으로부터 긁히고 깨진 매체의 흔적마저 드러냄으로써 '불이' (不二)와 중도의 개념을 실천
● 두 작가의 작업은 우리 고유의 정신이 담긴 관점을 매개로 숨을 주고 받으며, 한국미를 둘러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확대
 
2022년 3월 라흰갤러리가 기획한 김규, 우병윤 작가의 2인전 《숨결; 스미는 숨, 맞닿은 결》이 개최된다. 라흰갤러리는 그간 동시대 미술을 친숙한 방향으로 대중에게 소개할 뿐만 아니라, 내밀한 호흡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숨결을 엮어 온 한국 미술로부터 어떠한 본원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탐색해왔다. 일례로 지난 2020년 라흰갤러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 숨》 프로젝트는 작가 개인의 숨결에 살아있는 한국성을 천착하고자 했던 일차적인 노력의 발로였다. 그리고 이번 《숨결》 전시에서는 한국미를 둘러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한층 확대해보고자 한다. 전시명이 내포하고 있는 ‘스미는 숨, 맞닿은 결’이라는 뜻에 걸맞게, 김규와 우병윤 두 작가의 작업을 통해 장르를 초월하여 조응하는 한국적인 조형 언어와 예술 정신을 검토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나무를 소재로 작업하는 김규 작가는 ‘신목기시대’ (新木器時代)라는 상상의 유토피아를 주제로 삼는다. 문명을 태동케 한 원동력으로서 ‘나무’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 최초의 문명사가 지녔을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체로서 목적을 지닌 미의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규의 작품은 신목기라는 고고학적인 명칭만큼이나 유물 (토기)의 형태를 연상케 하는 동시에, 목재의 불완전한 요소를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나무의 벌어진 틈이나 균열, 여백으로부터 새로운 창조와 순리에 맞는 아름다움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역설한다.
 
한편 우병윤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우주 만물을 상호 연관된 ‘관계의 망’으로 파악하는 '불이' (不二)의 개념이다. 그의 지난 작업인 《공명》과 《점선면》 연작은 물론이거니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중첩》 시리즈 역시 이항대립을 극복한다는 정신을 표방한다. 여기서 불이의 사유를 표현해내는 핵심은 매체에 있다. 작가는 석고를 두껍게 바른 자리에 물감을 섞고, 뒤이어 석고를 얇게 긁어내는 인고의 노동을 반복하는데, 이 과정이 종국에 이르면 물감 아래에서 석고의 물성이 발현되며 석고와 물감이 둘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의 총체를 이루게 된다. 요컨대 긁히고 깨진 매체의 흔적을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작가는 모든 존재의 중도를 화폭에 건설한다는 철학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것은 틈새의 여백에 우주를 담음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전망했던 김규의 작업과 함께 우리 고유의 정신이 담긴 관점을 매개로 숨을 주고 받는다.
 



전시 서문

 

스미는 숨, 맞닿은 결
 
라흰갤러리 큐레이터 조은영
 

전시장을 찾는 방문객들을 맞다보면 종종 갤러리의 명칭과 관련하여 질문을 받곤 한다. 생소한 어감의 ‘라흰’은 불어의 관사 ‘La’와 순우리말인 ‘희다’를 조합한 것이지만, 이따금씩 나는 이 단어를 발음할 때 성대를 울리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특히 목구멍에서 나오는 ‘히읗’ 음은 숨소리를 동반함으로써 가벼우면서도 거룩한 뉘앙스를 허공에 머무르게 하는데, 구름 조각마냥 하얗고 쾌청한 이 음색과 빛깔을 바탕으로 삼아 작품을 눈에 담아 보라. 그러면 관객은 라흰의 공간이 마치 숨소리와 함께 하듯 작품을 피부 가까이 맞닿게 하고, 티끌 없는 순수함으로 그것의 의미를 비추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미지와 소리에 담긴 위와 같은 함의는 라흰갤러리가 구현하고자 하는 근본 취지와 맥을 같이한다. 동시대 미술을 무겁지 않은 방향으로 대중에게 소개할 뿐만 아니라, 내밀한 호흡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숨결을 엮어 온 한국 미술로부터 어떠한 본원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전통적인 방법론의 틀을 탈피하여 한국미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미술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의 보편적인 특성을 특정 작가와 시기에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집단으로서의 문화는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실체를 갖지 못하고, 한국미의 특성과 정체성은 부단히 변화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1]
 
그럼에도 한국 미술을 타자화하여 바라보려는 전시 기획과 연구가 생산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있는바, 라흰갤러리 또한 미시적인 관점을 넘어선 ‘개별적인 얼개들의 교차’라는 가치를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에서 모색해보고자 한다. 가령 지난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라흰갤러리의 《한: 숨》 프로젝트는 이처럼 작가 개인의 숨결에 살아있는 한국성을 천착하고자 했던 일차적인 노력의 발로였다. 그렇다면 김규, 우병윤 두 작가가 참여하는 이번 《숨결》 전시에서는 한국미를 둘러싼 경계를 넘나들고 또한 해체할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한층 확장한다. 《숨결》의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스미는 숨, 맞닿은 결’이라는 뜻에 상응하듯이, 두 작가가 서로의 작품을 통해 숨을 오가게 하고, 상대의 호흡을 받아 배어 나오는 결을 작업의 안팎에 새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번 전시는 장르를 초월하여 조응하는 조형 언어는 물론, 작가들의 작품에서 상생의 층위를 구성하는 한국적인 예술 정신을 검토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 균열의 틈새로 무늬를 이룬 여명기 - 김규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이윤의 원리는 냉혹하다. 특별히 섬세한 감각으로 미의 세계를 염원하는 예술가들에게 자본주의의 질서는 유달리 씁쓸한 소외의 경험을 안겼을 터이다. 나무를 주재료로 작업하는 작가 김규에게도 시대가 강제한 예속은 벅찬 문제로 다가왔다. 그래서 작가는 어떠한 공리적 타산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체로서 목적을 지닌 미의 영역으로부터 자구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예술의 상품화라는 명제를 그가 도모하는 미의 세계로 상쇄하는 것이다. 이렇듯 소유와 이윤을 추구하는 현상, 혹은 자유와 평등 개념을 궁리하던 김규의 고민은 역사의 여명기로 소급해 올라갔다. 그런데 역사의 간극을 넘어선 구역에서, 작가는 문명을 태동케 한 원동력으로서 ‘나무’의 의미를 다시 측량하게 되었다. 인류의 문명과 물질이 서로 맞물려 있다면, 최초의 문명사에 해당하는 시기는 ‘돌과 나무’의 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가치로써 소외의 고통을 극복하려 했던 그는 태곳적부터 인류와 함께해 온 나무로부터 마침내 미증유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신목기시대’ (新木器時代)이다.
     
신목기시대를 표방하는 김규의 작업에는 되풀이하거니와 ‘자유로움’을 향한 그의 예찬이 담겨 있다. 이 정신은 우선 목재가 지닌 원초적인 특성에서부터 배어 나온다. 신목기라는 고고학적인 명칭만큼이나 그의 작품들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 (토기)의 형태를 추구하는데, 장구한 세월과 함께 생긴 곡선과 흠, 깊은 빛깔과 그윽한 부식의 설움이 작업에 활용되는 통나무에 천연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나무의 생명력은 우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으며 나무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작업 방식에 힘입어 거리낌 없이 표출된다. 옆면으로 나무를 깎으며 우드터닝 (Woodturning)을 가능케 하는 목선반 작업이 대표적인 예이다. 회전축에 나무를 물리고 선삭 (旋削)하는 단계부터 색감과 질감을 표현하는 마감에 이르기까지, [2] 김규 작가는 뜻하지 않게 변화하는 나무의 상태까지도 ‘신선한 환기’로서 작업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김규의 작품들은 매끈함이 주는 쾌 (快)나 순후한 바탕과는 거리가 멀다. 나무의 균열과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결까지 작업의 일부로 동원하는 까닭에, ‘벌어진 틈’의 효과와 정서가 그의 작업의 기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목재의 불완전한 본질이 야기하는 이 틈새는 곧 여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김규의 여백은 신목기시대를 추구하는 주제 측면에서 억겁의 시간을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작가와 향유자 사이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말인즉 원시의 유물을 연상케 하는 그의 작업 앞에서 관객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와 만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간의 틈을 채우는 과정에서 (작가가 지향하는) 신목기시대의 가치를 엿보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균열의 틈새는 관객이 적극적으로 해석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여백을 유심히 관찰할수록 우리는 불완전과 완전이 다르지 않음을, 균열에서 곧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섭리를 깨닫는다. 달이 지고 나서야 해가 뜨고, 음양이 서로 교환되는 것이 인지상정에 부합하듯, 김규 작가는 불완전한 균열이야말로 오히려 순리에 맞는 아름다움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궁극적 차원에서 볼 때 작가는 비움의 유무를 통해 조형적인 긴장 관계를 구현하고 관객과 소통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참다움 경지에서 실천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틈새의 공간인 여백은 대비되는 두 세계의 관계 작용으로 만들어지며, 모든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상호 의존한다는 동양의 사유체계로부터 연유하지 않는가. 깨어지고 갈라진 김규의 작품을 보며 위안을 얻고 지친 삶에 쉼표를 더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그의 작업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고유의 지적 풍토와 사유가 은연중에 폐부를 절절히 파고드는 까닭이리라.
 
# 피아 (彼我)의 공존으로 직조하는 그물망 - 우병윤
 
무릇 공간이란 차등이나 구획을 두지 않고 온 천지를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를 넘은 인간의 이기 (利己)는 공간을 고형적인 벽으로 두르고 나누어 소외와 단절을 자초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내외부의 인공적인 차별을 두지 않는 한국의 전통 건축은 아집에 빠진 세상의 여론에 커다란 경종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누각은 벽을 없애어 구조 골격만으로 지어진 것으로, 자연을 닮음과 동시에 자연에 귀속되려는 용감한 의지의 발현으로 손꼽힌다. [3] 사람이 만든 것인지 풍화와 침식으로 드러난 어느 광물의 표면인지 모를 우병윤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전통 누각의 미학을 닮았다. 누각의 기둥들이 자연 안에서 중첩되면 어디가 나무이고 기둥인지 분간하기 어렵듯이, 우병윤의 작품 또한 녹수청산인 듯 안개에 쌓인 공백인 듯, 조형 요소들이 서로 경계를 오가며 긴장감 넘치는 궤도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기실 우병윤의 작업 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는 우주 만물을 상호 연관된 ‘관계의 망’으로 파악하여 이 천부의 불이 (不二)적 관계를 나누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그의 지난 작업인 《공명》과 《점선면》 연작은 물론이거니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중첩》 시리즈 역시 이항대립을 극복한다는 정신에 구체성을 보탠다. 다만 같은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들이 서로 힘을 주고받는다는 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했던 《공명》이나, 점·선·면의 단순한 조형 요소를 부각했던 《점선면》과 달리, 《중첩》은 작품의 직접적인 표면을 거침으로써 사유의 심연에 도달한다.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는 ‘표면’이란 매체의 물성과 그의 내면세계가 겹쳐지는 중첩의 구역이다.
 
그렇다면 매체는 우병윤의 《중첩》을 가능케 하는 제일의 조건인 셈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건축 재료로 자주 쓰이는 석고를 물감과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같이 석고의 물성을 이미지에 입히게 된 것은 질감과 양감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했던 실험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석고의 효과가 빛나기 위해서는 오랜 인고의 과정이 필요했다. 물감은 캔버스에 바르는 즉시 면에 안착하지만, 석고는 층층이 덧발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가장 이상적인 중첩의 균형을 찾기 위해, 석고를 두껍게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거듭해 나간다. 또한 적합한 텍스처가 구현된 이후에는, 여기에 다채로운 색을 섞는 배색의 단계로 접어든다. 물이 많이 섞인 과슈 물감은 마르기까지 강한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작가는 이 과정에 뒤이어 곧장 석고를 얇게 긁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소되는 자신을 느끼며 수없이 톤을 포개고 긁어내는 노동의 끝에 이르면, 물감 아래에서 석고의 물성이 발현되어 마침내 하나의 덩어리로부터 파편 같은 빛이 난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병윤은 인접을 불허할 듯했던,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통찰을 포착했다. 석고와 물감이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닌 개별 존재인 동시에, 상이한 둘이 아닌 상태에서 하나의 총체와 형태를 이룬다는 것이다.
 
우병윤의 작품이 고담한 아취를 자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정을 일순간 크레셴도로 치닫게 하는 까닭은, 그의 회화 언어들이 이처럼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얼키설키하게 서로를 포섭하고 반영한다는 데에 있다. 또한 우병윤의 작업을 일다불이 (一多不二)한 피아의 그물망으로 상정할 때, 우리는 작가가 스스로를 하나의 그물코로 환원하여 그가 만든 직물 안에 자신을 꿰매어 넣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리저리 긁히고 깨진 석고로부터 나를 발견”했다는 작가의 언급이나, 이 흔적을 드러내는 행위로 우주와 나, 모든 존재의 중도를 화폭에 건설한다는 그의 철학이 이를 방증한다. 요컨대 김규 작가가 틈새의 여백에 우주를 담음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전망하려는 도화선을 마련했다면, 이것은 불이를 실천의 틀로 삼은 우병윤의 중첩에 이르러 단번에 점화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숨결》의 두 작가가 우리 고유의 정신을 녹아내어 제시하는 관점은 특별히 분리와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지고의 위기에서 더욱 튼튼한 자기 바탕을 가질 뿐만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가 되어 심장에 부딪쳐 온다.
 
 
 
[1] 박이문,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서울: 당대, 1997), 210-212.
[2] 정희석, 『목재용어사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67, 112.
[3] 임석재,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7: 한국의 꽃살, 기둥, 누각』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95-99.




김규, p_1, wood, 옻칠, 450x430mm, 2022



김규, p_4, wood, 75x485mm, 2022, 김규, p_7, wood, 60x210mm, 2022, 김규, p_8, wood, 60x210mm, 2022



김규, p_5, wood, 80x365mm, 2022, 김규, p_6, wood, 70x410mm, 2022



우병윤, 중첩 No.21-11-119, Plaster and gouache on wood panel, 116.8x91.0cm, 2021



우병윤, 중첩 No.22-01-146, Plaster and gouache on wood panel, 162.2x130.3cm, 2022



우병윤, 중첩 No.22-02-147, Plaster and gouache on wood panel, 111.8x91.0cm, 2022



우병윤, 중첩 No.22-02-153, Plaster and gouache on wood panel, 145.5x112.1cm, 2021



우병윤, 중첩 No.22-02-154, Plaster and gouache on wood panel, 145.5x112.1cm,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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