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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寫)에서 진(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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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미 포토그라피((寫)를 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진(眞)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진(眞)’은 무엇이냐.(박주석)
 
언주라운드, 루모스, 혜윰은 공동기획으로 <사(寫)에서 진(眞)으로>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컬렉션 지평’의 협력으로 한국사진학의 개척자 신낙균, 한국인 최초로 개인사진전람회를 개최한 정해창을 비롯한 현일영, 임응식, 김한용, 민충식 등 22명의 작가 총 50점의 빈티지 프린트, 오리지널 프린트를 국내에 처음 공개한다.
 
이번 기획은 박주석 교수(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의 새로운 저서 <한국사진사>(문학동네, 2021년 11월 출간)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자, 한국사진사의 역사를 돌아보며 오늘날 우리에게 ‘진(眞)’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이다.
박주석 교수는 한국사진의 아키비스트이자 전시기획자로 활동해온 학자로 우리나라의 사진 도입에서부터 현대미술의 중심에 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진의 역사를 총망라한 <한국사진사>를 통해 ‘진’을 ‘사’하는 전통과 철학을 이을 것을 주문한다.
 
사진은 베낀다는 뜻의 사(寫)와 참된 모습이라는 진((眞)의 결합어이다. 박주석은 사진을 동양미술의 전신사조 미학과 연결짓고, 고려시대의 이기이원론, 조선 후기 사실주의 정신에서 온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은 이미 포토그라피(寫)를 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면 남는 것은 진(眞)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진(眞)’은 무엇이냐.(박주석)라고 묻고 있다. 전시명 <사(寫)에서 진(眞)으로>는 이런 박주석의 주장과 사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국사진은 21세기의 문턱에 들어서서 지난 세기의 어떤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진이 예술 담론의 중심으로 다뤄지고 실제 전시나 출판의 영역에서도 다른 매체에 비해 압도적인 양으로 등장하는 미술계의 추세를 반영한 것이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고, 1980년대 이후 한국사진의 역량이 대폭 강화된 측면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겠다. 이런 현상은 분명 한국사진에는 하나의 기회이며 동시에 압박이기도 하다(중략) 디지털을 넘어 AI 시대의 환경 속에 한국사진은 서 있고, 미래의 문화를 주도할 책임이 주어졌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한국사진사 536-537쪽)
 
이번 전시는 박주석 교수가 <사진컬렉션 지평>(Jipyung Collection)을 통해 소환한 22명의 작가를 통해 한국사진계의 숙제로 남겨진 진(眞)의 문제를 함께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 오르길 권유한다.
 
<사진컬렉션 지평>은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만들어졌고, 역사적, 미학적,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는 1,300여 점의 빈티지 및 오리지널 사진 작품과 150여점의 일제시기 유리원판으로 구성한 컬렉션이다. 컬렉션의 구성은 한국사진사 연구를 처음 개척했고 기본 사료를 모아 정리한 고 최인진(故 崔仁辰, 1941~2016)선생의 수집품 800여 점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명지대학교 박주석 교수가 한국사진 연구 중 수집한 700여 점의 빈티지 및 오리지널 프린트를 더해서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50여 점의 작품은 고 최인진(故 崔仁辰, 1941~2016)선생과 박주석 교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컬렉션 지평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인 신낙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학 학자이기도 하며 교육자였다. 이번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한 ‘무희 최승희’ 외에 자화상을 통해 작가로서 미학적 가능성을 넓힌 점에 주목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 개인전람회를 개최한 정해창의 사진미학을 통해 독자적인 한국적 작품세계를 경험할 수 있으며, 탄광을 소재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테마로 삼아 만든 임석제, 생활주의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기치로 내세운 임응식 등을 만난다. 한국사진의 주류로 급부상한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은 작가의 자기모순과 공모전용 걸작 사진의 범람, 뜻밖의 획일화라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당대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다. 이밖에 이형록을 필두로 한 ‘싸롱 아루스’의 회원이기도 했던 이상규 김행오 등의 작품을 통해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의 형식적 한계를 벗어나 조형성을 강화시킨 사진들도 만날 수 있다.
 
작가주의 사진가 부운 현일영은 당대에는 참다운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번 소환을 통해 독보적인 작품 세계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기대한다. 이외에도 예술사진의 유행과 사회주의리얼리즘 사진, 살롱사진, 생활주의리얼리즘 등의 조류와 함께 활발하게 활동했던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사진사>의 출간은 <한국사진역사전>(1998), 최인진의 <한국사진사 1631-1945>(1999)년 이후 20여년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한국사진사>는 한국 사진의 역사고 곧 한국 근현대사가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앞으로 이 저서와 출간기념전을 계기로 한국사진사와 사진계의 발전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사진컬렉션 지평

<사진컬렉션 지평>은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만들어졌고, 역사적, 미학적,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는 1,300여점의 빈티지 및 오리지널 사진 작품과 150여점의 일제시기 유리원판으로 구성한 컬렉션이다. 컬렉션의 구성은 한국사진사 연구를 처음 개척하셨고 기본 사료를 모아 정리하신 고 최인진(故 崔仁辰, 1941~2016)선생의 수집품 800여점을 기본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명지대학교 박주석 교수가 한국사진 연구 중 수집한 700여점의 빈티지 및 오리지널 프린트를 더해서 만들었다.

고 최인진 선생은 1941년 생으로 동아일보 사진부장, 명지대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고, 1978년 사재를 털어 <한국사진사연구소>를 개설하여 한국사진사 자료 수집과 역사 정립에 평생을 헌신했다.<한국사진사연구소>는 2003년 명지대학교 부설 연구소로 편입되었고, 도서와 기본 연구 자료들을 명지대학교로 이관했다. 다만 사진작품 컬렉션은 선생의 개인 소유로 놓아 두셨다가 작고하시기 직전 선생과 유족들의 합의로 여러 과정을 거쳐 ㈜작품오늘에 이관했다.

이후 ㈜작품오늘의 김현수 회장과 명지대 박주석 교수는 한국사진의 역사를 구성하는 작품은 하나의 컬렉션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최인진 컬렉션과 박주석의 개인 컬렉션을 합쳐 하나의 컬렉션으로 만들고 이름을 ‘사진컬렉션 지평’, 영문으로는 ‘Jipyung Collection’으로 지었다. 앞으로 한국사진의 연구자들과 전시를 기획하는 기관에게 컬렉션 정보 제공, 작품 대여, 컬렉션 추가 연구 및 확충 등을 해나갈 계획이다.

 



민충식, 마술사2, 젤라틴실버프린트, 오리지널프린트, 247cm X 169cm, 1930년대, 주명덕 인화. 사진컬렉션 지평



신낙균, 무희 최승희, 젤라틴실버프린트, 무희 최승희, 빈티지프린트, 204cm X 147cm, 1930. 사진컬렉션 지평



이형록, 구성(構成), 젤라틴실버프린트, 사협출품, 빈티지프린트, 176cm X 208cm, 1955. 사진컬렉션 지평



정해창, 무제(여인의 초상), 젤라틴실버프린트, 오리지널프린트, 607cm X 507cm, 1929, 구본창 인화. 사진컬렉션 지평



현일영, 시간은 흐른다, 젤라틴실버프린트, 빈티지, 254cm X 204cm, 1966. 사진컬렉션 지평


작가약력

박주석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사진사 및 사진 기록 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며, 한국이미지언어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했고, 영국 에식스대학교에서 미술사 석사학위를, 중앙대학교에서 기록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구예술대학교와 광주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98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사진역사전》 큐레이터, 2001년 독일 헤르텐에서 열린 《The Century of Korean Photography》전 큐레이터, 2006년 대구사진비엔날레 수석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사진과 기록에 관련한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는 『박주석의 사진 이야기』 『주명덕 JOO MYONG DUCK PHOTOGRAPHY』, 번역서로는 『사진예술의 역사』 『사진에 나타난 몸』, 주요 논문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진의 의미」 「사진과의 첫 만남-1863년 연행사 이의익 일행의 사진 발굴」 「1950년대 한국사진과 인간가족전」 등 다수가 있다.
 

강대석(姜大奭 1909~1993)
진영보통학교와 YMCA 사진과 그리고 동경사진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부터 부산 자택에서 <동아사진관>을 운영했다. 1933년 동아일보 부산지국에서 사진기자를 시작했고, 서울로 이주해 1936년부터 1937년 12월까지 동아일보 사진부장을 역임했다. 특히 신문 스케치사진을 통해 일제 시기의 예술사진을 선도했고, 작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김광배(金光培 1898~1978)
1919년 <옥영사진관>에 입사해 김시련에게 사진을 배웠고, 1923년 일본에 건너가 노노미야사진관에서 2년여 간 사진술을 익히고 귀국해 1925년 종로 서린동에 <금광당사진관>을 열었다. 1926년에는 조선인 사진사들이 결성된 <경성사진사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간사를 맡았고, 1932년에는 <경성인상사진연구회>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에는 <경성사진사협회>가 개설한 부속 사진강습원에서, 1934년에는 <경성사진학강습원>에서 사진 강의도 했다. <금광당사진관>은 일제 시기 명성이 가장 자자했던 대중적인 조선인 사진관이었다.
 
도봉준(都蓬俊 1923~?)
1955년 <대구사광회> 창립회원으로 사진에 입문했으며, 1956년 대구매일신문 주최 어린이사진전에 최고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일본 아사히신문이 주최한 국제사진살롱에 <여생>이 입선하면서 사진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대구 매일신문과 영남일보 사진부 기자를 지냈고, 대구 경북지역의 사진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김행오(金行五 1927~2014?)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으며, 1953년부터 사진을 시작했다. 1958, 61, 63년 3회에 걸쳐 미국 『US Camera』가 주최한 국제사진전에 입선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61년 <싸롱 아루스> 창립 회원으로 참가하고 <현대사진연구회>를 지도하면서 한국사진의 이론가로도 활약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언론인으로 지내다 생을 마감했다.
박달근(朴達根 1926~2000)
대구 대륜고 교사로 재직하던 1957년 <대구사우회>에 참가하면서 사진가로서의 길을 걸었고,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7년에는 「신카메라교실」이란 책을 발간했으며, 사진의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고 유제를 긁어내는 등 당시로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박필호(朴弼浩 1903~1981)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고,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5년 종로 3가에 <연우(硏友)사진관>을 개관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초상사진의 시대를 이끌었다. 1929년 조선박람회 기념 《전국예술사진공모전》 특선작인 <오후>를 비롯하여, 1937년 제4회 《전조선사진살롱》에서 입선한 <이야기> 등 작품이 유명하다. 1938년 이후 <경성사진학강습원> 교장을 맡았고, 1964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에 사진과를 개설하고 학과장을 맡은 사진 교육자이기도 했다.
 
신현국(申鉉國 1924~1997)
경북 선산 출생으로 1955년 <대구사광회>를 통해 사진에 입문했고, 1957년부터 1982년까지 대구 매일신문사 사진기자와 사진부장을 지냈다. 1963년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걸었다. 작품집으로 『인생의 목격자』(사진예술사)가 있다.
 
안월산(安月山 1909~1978)
대구 출생으로 본명은 안성호(安成浩)이다. 일본의 동경전기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1941년 방첩연맹사진전에 특선으로 입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걸었다. 1948년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주최한 제2회 예술사진전람회에서 <기와굴의 아침>이 특선1석으로 선정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4년 <대구사우회>를 창설해 후학을 지도하면서 대구사진을 이끌었다.
 
이상규(李商圭)
1950년대 산업은행 조사부 직원이었고, 이형록과 더불어 <신선회>, <싸롱아루스>, <현대사진연구회> 등에 참여했으며, 특히 1961년 <싸롱아루스>전에 출품한 <길> 등 7점의 사진이 조형성의 완결성을 이루었다는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다. 김행오와 더불어 사진 이론가 역할도 수행했다.
 
조규(趙圭)
1956년 이형록의 주도로 설립한 <신선회(新線會>에 참여하면서 사진가로서 이력을 시작했다. 임응식이 주도한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총무를 맡아 사진계를 이끌기도 했고, 주로 신선회전이나 한국사진작가협회전 등의 단체전을 통해 활동했다. 1950~60년대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이었다.
 
한영수(韓榮洙 1933~1999)
경기도 개성 출생으로 한국 최초로 리얼리즘 사진을 연구한 단체 <신선회(新線會>의 회원으로 참가하면서 사진가로서 이력을 시작했고, 1958년부터 1960년대까지 줄곧 6·25 전쟁을 겪고 난 이후의 서울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으로 유명했다. 1962년 <한국상업사진가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광고사진가로서 길을 걸었고, 1966년에는 <한영수사진연구소>를 설립해서 광고 및 패션 사진 분야의 개척자로 활동했다.
 
김정래(金貞來 1913~1989)
서울 출생으로 1925년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26년 동아일보에 사진반 견습사원으로 들어가 사진을 시작했다. 1942년부터는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사진부장으로 일했고, 해방 후 1945년 10월 『자유신문』 창간에 참여해 사진부장으로 일했다. 1937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납량사진현상모집》에서 <한강의 돛단배>로 특선을 하면서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1946년 <조선사진건설위원회>가 3.1절을 기해 개최한 《해방기념사진전》을 주도하는 등 광복 이후 한국 사단 형성에 기여했다.
 
김한용(金漢鏞, 1924~2016)
평남 영천 출생으로 중국 봉천성에서 성장하였다. 봉천성립제일공업학교 인쇄과를 다니며 인쇄와 사진을 배웠다. 1947년 설립한 국제보도연맹의 첫 사진기자로 입사해 사진화보잡지 『국제보도』에 주로 사진을 게재했다. 회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1959년 충무로에 국내 최초의 광고사진 스튜디오인 <김한용사진연구소>를 열고 영화스틸사진과 광고사진을 시작하면서 국내 광고사진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했다. 1984년 출간한 <김한용 사진집>은 그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집이다.
 
문치장(文致暲 1900~1969)
서울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조선총독부 산림과 제도수 겸 사진과 조수로 사진에 입문했고, 1921년 경성 사진제판소에서 사진제판술을 습득했다. 1922년 동아일보의 사진기자로 첫출발을 한 후 여러 민간지를 거쳤고, 동아일보에서 1940년 퇴임했다. 일제 시기 수많은 뉴스사진을 생산하면서 노련한 사진적 재능을 드러냈고, 특히 1933년 비행기를 타고 서울시 전체를 촬영한 항공사진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시각적 확장이라는 새로운 장을 제공한 것이었다.
 
민충식(閔忠植 1890~1977)
서울 출생으로 경신학교 재학 시절 사진을 접했다. 일본에서 메이지대 경제학과를 다녔고, 방학을 맞아 서울에 머물던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공적 사진교육기관이었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사진과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20년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KODAK사의 상해지점에서 세일즈맨으로 근무했고, 1930년 귀국해 낙원동에서 <태평양사진관>을 운영했다. 1927년 창설된 민족적 사진단체였던 경성사진사협회의 창립회원이기도 했으며, 사진의 기록성 등에 관한 소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초기 한국사진에서 영업 초상사진과 순수 기록사진이라는 두 영역을 동시에 개척한 선구자였다.
 
박영달(朴英達 1913~1986)
대구 출생이지만 1938년 대구일보 포항지사에 부임한 이래 줄곧 포항에서 활동했다. 6·25 전쟁 직후 포항에 사진 디피(DP&E)점을 내고, 구왕삼의 권유로 사진에 입문했다. 1957년 대구 미문화원에서 개최한 《제1회 사진개인전》에서 자신의 독특한 사진 세계를 펼쳤고, 1958년 <풍선>과 1963년 <길동무>가 일본 아사히신문사의 《국제사진살롱》에서 입선하면서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1965년 《제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와 1966년, 1967년 《동아사진콘테스트》 등에 입선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신낙균(申樂均 1899~1955)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일제 시기 한국 근대화의 선각자로 한평생을 살았다. 1927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일본 동경사진전문학교에서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졸업했으며, 귀국한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적 사진교육 기관인 YMCA의 사진과 교수로 부임하여 근대 사진교육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사진 공교육을 위해 『사진학 개설』이라는 우리 최초의 사진학 저서를 출간하여 사진의 학문적 체계를 정립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사진과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과 민족정기를 수호하려는 기자 정신을 발휘했다. 근대적 자화상을 많이 만든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형록(李亨祿 1917~2011)
강릉 출생으로, 친형 이상록이 강릉에서 영업사진관을 운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진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1935년 강릉우체국 직원으로 부임한 임응식을 만나 <강릉사우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작가의 길을 걸었다. 1936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공모전 《약진 조선의 표정》에서 <도시의 구도>가, 1937년 조선일보의 《납량사진공모전》에서 <어항의 황혼>이, 1939년 <전조선사진연맹>이 주최한 《조선사진전람회》에서 <산촌의 아침>, <전원> 등이 입상하면서 사진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56년 <신선회(新線會)>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리얼리즘 사진에 투신했고, 1960년 <싸롱아루스(Salon Ars)>를 창립하면서 조형주의 사진의 길을 열었다. <현대사진연구회>를 만들어 후학의 양성에도 힘썼다.
 
임석제(林奭濟 1918~1994)
평북 정주 출생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근처 진남포 <이카리사진관>에서 도제로 사진을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전문부 교외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공부하면서 일본에서 유행하던 예술사진을 습득했다. 1940년 <전조선사진연맹>이 주최한 《馬사진전》에서 <말>이 입상했고, 해방 후인 1948년 영자신문 『서울타임즈』에 입사하여 6·25 전쟁 전까지 사진부장으로 있었다. 1948년 리얼리즘 사진을 기치로 해방 후 최초의 개인사진전람회인 《제1회 임석제 예술사진 개인전》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하면서 최고의 사진가로 입지를 굳혔다. 1954년 <탄광> 시리즈는 탄광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을 단일 주제로 삼은 연작사진으로, 동시대 리얼리즘 사진의 형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임응식(林應植 1912~2001)
부산 출생으로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거쳐 도시마체신학교를 졸업했고, 귀국 후 조선총독부 체신국 서기보로 임관한 뒤 강릉우편국, 부산지방체신국 등에서 근무했다. 1925년 <부산여광사진구락부>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으로 활동하며 사진에 입문했다. 1934년 일본 월간사진잡지 『사진살롱』에서 <초자(硝子)의 정물>이 입선했고, <전조선사진연맹>이 주최한 《조선사진전람회》에서 1937년에 입선한 <둑을 가다>와 1938년에 입선한 <모자(母子)> 등이 유명했다. 강릉에서 근무할 때는 <강릉사우회>를, 부산에서는 <부산광화회>(이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로 개칭)를 결성하였고, 1·4 후퇴로 전국의 사진가들이 부산으로 모여 들자 1952년 <한국사진작가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해방 후 6·25 종군의 경험으로 사회 현실을 직시하면서 생활주의리얼리즘 사진을 주창하며 한국사진에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다.
 
정해창(鄭海昌 1907~1968)
서울 종로에서 출생했고, 1922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동경외국어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했다. 유학 시절에 서양화를 배우고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화학과 피그먼트 인화법을 연구하며 사진가의 길로 들어섰다. 1926년에는 중국에 체류하면서 사진술뿐만 아니라 동양철학과 금석학 연구를 병행했다. 1929년 서울 광화문빌딩 2층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5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 《정해창군예술사진작품전람회》를 개최하여 한국사단의 큰 전환기를 만들었고, 예술사진 활동을 중단한 1939년까지 10여 년간 4회에 걸친 개인전을 통해 독특한 한국적 미의식이 깃든 500여 점의 사진 작품을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 덕성여대 등에서 사진예술과 동양미술사를 강의했고, 1959년 로버트 맥클로이(Robert A. MeCloy)의 『실용 사진학』 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현일영(玄一榮, 1903~1975)
서울 출생으로 매동상업학교를 졸업했고, 1922년 YMCA의 영어과에서 수학하면서 사진과 접했다. 1926년 일본인 회사에 취직이 되어 만주로 가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으며, 1932년 서울로 돌아와 1933년 종로 2가에 현일영사장을 개업했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오리엔탈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귀국해서 일본 오리엔탈사진공업사 서울 지부에서 일했으며,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로라이 라이카 구락부> 등의 사진단체를 주도했다. 해방 후에는 경향신문 촉탁 사진기자로 활동했고,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다시 기자로 활동했다. 1956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된 《제3회 개인전》부터 한국사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사진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1972년 마지막 개인전 《부운 현일영 사진소품전》을 개최할 때까지 9회에 걸친 개인전으로 창작 활동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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