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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Lau, gh - Nothing needs to be tragedy

  • 작가

    박경률 최하늘 홍승혜

  • 장소

    원앤제이갤러리

  • 주소

    서울 종로구 북촌로 31-14 (가회동)

  • 기간

    2021-02-25 ~ 2021-04-11

  • 시간

    9:00 ~ 9: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연락처

    02-745-1644

  • 홈페이지

    http://oneandj.com/

  • 초대일시

  • 관람료

    무료관람

갤러리 가기
전시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는 희극적 요소를 가진 작품들에 대한 찬미이다. 
전시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희극적 요소들은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이나 공연예술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다르다. 스토리 구성의 짜임이나 극적 장치를 통한 것이라기 보다는 농담이나 유머에 속할 것이며, 어떤 대상을 희화화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주지할 것은 다만 대상을 조소하는 것은 좋은 희극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시각적으로 우스운 생김새를 만들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형태를 비트는 것은 단순하고 일차적인 농담일 뿐, 훌륭한 희극이 아니다. 희극적인 것은 대상의 내부와 외부의 격차에서 보여지는 공허함을 폭로하는 것이라기 보다, 그 공허함을 구성하고 전체적인 설정을 편성하는 것이다. 앞서 주판치치를 빌어 말했듯이 희극은 대상에 대한 몽타주다. 전시가 당신에게 보도록 제안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전시에 초대된 세 작가가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어떤 몽타주를 그려가고 있는지, 그리고 전시가 왜 그것을 찬미하는지가 될 것이다. 

우선 세 작가들이 유머와 농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보자. 간략히 소개하자면 박경률은 ‘(위대한) 회화의 역사’, 최하늘은 ‘(위대한) 조각의 역사’, 그리고 홍승혜는 ‘(위대한) 추상미술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작품에서 농담의 대상이 되는 것은 ‘미술'이며,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것의 외관이다. 세 작가는 이전부터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매체와 장르를 탐구하고 - 모더니즘 이후 논의 되어 온 - 매체성과 매체의 확장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을 해왔다. 미술사 속에서 각각의 매체들은 평면성, 구축, 본질과 원초적 실재의 탐구 등의 틀 안에서 논의되어 왔는데, 그 중심에는 매체마다 하나의 추구되어야 할 (또는 추구되어 온) 본질적 특성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지적 깨우침이나 감각적 각성을 발현시킨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세 작가는 이 믿음들을 다시 구성함으로써 미술의 몽타주를 그려간다.



박경률, 〈그림 3〉, 2020. 캔버스에 유채, 280 x 230 cm


박경률, 〈그림 4〉, 2020. 캔버스에 유채, 165 x 165 cm

박경률은 입체적 표현과 평면적 표현, 추상과 구상을 한 화면에 함께 구성하고 여러 회화사조들의 특성들을 혼합한다. 그의 이전 작업들에서 보여지는 여러 오브제들은 초현실주의적, 입체주의적, 팝아트적 특성을 가진 것들의 혼합이며, 작가는 정해진 원칙없이 그것들을 자유롭게 구성한다. 최근 작품에서는 회화의 평면성을 충실히 따르는 듯 보이다가도 퍼포머티브한 스트로크를 강조하며,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 ~ 1994)와 로젠버그(Harold Rosenberg, 1906-1978)의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과 액션에 대한 논쟁을 상기시킨다. 한 화면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여러 요소들이 바로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농담이 된다. 그의 농담은 역사 안에서 이어져 온 회화의 여러 믿음들, 논쟁들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들의 특성을 혼합하여 ‘있음'과 ‘없음' 사이에 존재하는 그의 그림 자체이다. 동시 공존을 가시화함으로써 회화의 본질은 어떠한 하나의 믿음 아래에 있지 않으며, 회화의 표면에서 드러나는 그 자체에 있음을 직접 구성해보이는 데에 있다.



최하늘, 〈아빠〉, 2020. 희생된 육신은 액자에 프린트된,  C-프린트, 200 x 110 cm
최하늘, 〈아빠〉, 2020. 희생된 육신은 액자에 프린트된, C-프린트, 200 x 150 cm


최하늘의 조각들은 모더니즘 조각을 연상하게 하는 두 명의 대디(Daddy)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이다. 그 자식들은 엄숙해 보이는 두 대디와는 달리 어딘가가 꺾여있거나 어색하게 접붙여져 있으며, 흡사 병신춤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동세를 취하고 있다. 최하늘의 유머는 이 둘의 관계 안에서 드러난다. 두 대디는『현대조각의 흐름』(예경; 1997)의 도판으로 나올 법한 사진으로 그 위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네 명의 자식들에 의해 그 실체가 폭로된다. 쇳덩이 또는 돌덩이로 보였던 두 대디는 사실 그럴듯하게 칠해진 스티로폼이었으며, 생산을 위해 해체되고 재조립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다. 조각들은 제 아비의 육신을 취함으로써 그 허구를 드러내고 그것의 위상을 격하시킨다. 하지만 최하늘의 농담은 두 아비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우스꽝스러운 자식 조각들과 사진 속 (또는 역사 속) 엄숙한 조각들은 서로의 실체를 보완하고 다시 구성하며, 보다 가까이 ‘조각’이라는 것을 경험하도록 한다. 바로 그 발견 안에 작가의 농담이 존재한다. 이 조각들이 만약 ‘육신을 취하여 생명을 얻은' 죄인의 모습으로 두 아비를 신격화하였다면, 그것은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비극으로 제시되었다면, 관객들은 위대한 두 아비를 우러러보고, 비체(abject)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들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며 함께 하고자 하는 동력을 만들어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대신 대상(조각)의 실재를 구성하고 재편성하는 것을 양보해야 했을 것이다. 



홍승혜, 〈Digital Carpet〉, 2021. Adhesive vinyl sheet on floor, 가변 크기



실재와 본질의 추구에 있어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던 추상미술이 순수한 정신성의 최종 단계로 검은 사각형을 제시하였다면, 홍승혜는 (정신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기계로부터 디지털 픽셀의 검은 사각형을 가져와 단순한 기호, 또는 가벼운 디자인으로 만들어낸다. 이것은 일종의 검은 사각형에 대한 구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91~1935)의 검은 사각형은 디지털 픽셀과 그 외적 차이가 없음에도 역사의 무게와 늘 동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기하학적 형상들에게서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그것이 무게 없는 디지털의 세상으로 뛰어들어 춤 추게 한다. 그에게 희극적 대상은 이 둘의 유사와 차이다.  추상미술과 홍승혜의 픽셀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내용 없음'이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내용 없음'이다. 추상미술이 예술의 내용을 버리고 형식을 취하고자 화면 안에서의 구성과 리듬을 주요소로 삼으면서도 결국 그 안에서 ‘정신성'이라는 내용을 만들어낸 것과 달리, 홍승혜는 기계를 이용한 생산을 통해 더 극단적인 ‘내용 없음'을 추구한다. 그의 픽셀들은 볼륨이 거의 없는 바닥의 시트지로 존재하거나, 가상의 화면으로 들어가 더 납작하고 가벼운 형태를 취한다. 그의 작품들은 움직임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 또는 그 존재 자체가 부재함을 드러내며 추상미술의 역사를 함께 구성해 나간다. 이는 새로운 구성이 아닌 본래 있던 것의 재구성이며, 아방가르드의 실패를 다시 틈으로 생성하고, 실패의 감각을 대상의 실재를 인지하는 가능성으로 재편성하는 농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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