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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누군가에게는 멈추고픈, 또는 흘렀으면 하는 시간 / 달리, 기억의 지속
  • 작성일2020/12/01 18:44
  • 조회 525
누군가에게는 멈추고픈,
또는 흘렀으면 하는 시간
달리_기억의 지속


 

<기억의 지속>, 1931, 달리


흐물흐물 늘어진 시계가 눈에 띄었다. 스페인 출신 괴짜 화가는 대형 마트에 걸려 있는 자기 작품 속 시계와 판박이인 벽걸이 시계를 보면 뭐라고 할까?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면서도 가장 대중적인 화가 중 하나라는, 존재부터가 아이러니했던 살바도르 달리의 대표작이 바로 <기억의 지속>이다.
 
<기억의 지속>에는 네 개의 시계가 등장한다. 바닥에 역시 흐물흐물 늘어져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 위에서 흘러내리는 시계, 판판한 갈색 상자 위에 놓인 두 시계와 안이 텅 빈 죽은 나무 위에 걸린 시계.

일단은 그림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바다와 깎아지른 해안가가 보이지만 대지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당시 달리의 허전한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만 같다. 앞으로 시선을 옮기면 보이는 갈색 상자는 계단의 제일 아랫부분이라 추측할 수 있는데, 달리는 다른 작품에서도 계단을 소재로 삼아 많이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 계단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던 달리가 유일하게 짝사랑하다시피 흠모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프로이트와도 관련이 있을 거라 여겨진다. 프로이트는 계단과 산처럼 올라가는 구조를 지닌 물체를 성행위와 연관시켰는데, 이 계단과 위에 놓인 세 개의 시계, 그리고 올리브 나무는 성에 대한 불안감과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달리는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던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와 서로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했는데, 후에 달리는 자서전에서 이 작품의 창작 배경을 밝혔다. “어느 날 저녁, 갈라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영화를 보러 나가고 나 혼자 집에 있었다. 순간 나는 갈라가 2년 전 갑자기 엘뤼아르를 떠난 것처럼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고 이내 깊은 절망에 빠졌다.”




<나의 욕망의 수수께끼>, 1929, 달리
 

갈라를 깊이 사랑했던 달리가 그녀를 ‘나의 작은 올리브’라고 불렀다는 사실로 보아 다른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올리브는 갈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 속 올리브는 바싹 말라 죽어 있고, 흐물거리는 시계가 걸쳐져 있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시계는 없어져 있고, 개미 떼가 몰려 있다. 개미 떼는 죽음을 의미한다. 12살이나 연상이었던 갈라가 자기보다 먼저 죽거나 자길 떠날지도 모른다는 순간적인 공포가 작품 전반에 짙게 깔려 있는 셈. 흐물흐물해져 있는 시계에는 시간을 왜곡해서라도 갈라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담겨 있다. 아래 바닥에 누운 종잡을 수 없는 물체는 얼굴의 일부같이 생겼는데, 이는 달리의 <나의 욕망의 수수께끼><위대한 마스터베이터>에도 나오는 작가의 분신격인 자화상이다.



<위대한 마스터베이터>, 1929, 달리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영화, 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힌 다재다능함과 스스로 유명세를 즐기고 특별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던 달리의 사진을 보면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기억의 지속>을 보면서도 그 속에 담긴 불안을 읽어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누군가에겐 흘러야 안목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고, 누군가에겐 멈추고만 싶은 것이 시간이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게재된 글은 백영주의 '세상을 읽어내는 화가들의 수다'에 수록되었으며 저작권은 백영주에게 있고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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