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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대가의 숨겨진 뮤즈 / 라파엘로_라 포르나리나
  • 작성일2020/12/30 15:55
  • 조회 1,037
대가의 숨겨진 뮤즈
라파엘로, 라 포르나리나

 

‘제빵사의 딸’이라는 제목의 초상화를 상상해보자. 그림 속 여인은 어떤 모습일까?

갓 부풀어오른 빵처럼 푸근하고 풍만한 여인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라파엘로의 가장 아름다운 성모화로 꼽히는 <세졸라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자의 성모)를 보자.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속에 있던 고민까지 스르르 녹아 버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아름답고 따사로운 그림이다. 이 성모화의 모델은 그가 죽기까지 12년간 사랑했던 여인을 모델로 한다.


<세졸라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자의 성모), 라파엘로, 1514
 

그 여인의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 그녀의 초상화를 일컫는 ‘라 포르나리나' 라는 말은 ‘제빵사의 딸’을 뜻한다. 대가의 뮤즈답게, 평범한 신분에도 초상화 속 그녀에게는 고귀한 아우라가 풍긴다.
 
라 포르나리나는 허리 아래로 두툼한 천을 두르고, 왼손을 다리 사이에 가져가 전형적인 ‘정숙한 비너스’의 자세를 취한다. 이와 더불어 시선을 살짝 왼편으로 향하게 하여 관람자와의 직접적인 눈맞춤을 피함으로써 스스로 정숙한 여인임을 강조하려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관능미를 뽐내고 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가리려는 듯한 몸짓을 취하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봉긋한 양쪽 가슴이 더 도드라져 보이며, 가슴 아래를 덮고 있는 얇은 천 역시 배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편, 라파엘로는 다양한 천의 질감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으며, 능숙한 음영처리를 통해 인물의 신체적 매력을 고조하였다. 그림 속 여인이 머리에 쓰고 있는 이국적인 터번은 마치 손으로 만져질 듯하며, 그녀의 배를 덮고 있는 의상 역시 육감적인 여체를 훤히 드러낼 정도로 투명하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강한 인공 조명은 어두운 색조로 처리된 배경과 대조를 이루며 여인의 부드럽고 볼륨감 있는 형태를 강조한다.

사실 이 초상화가 지금의 제목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이기 때문에, 라파엘로가 마르게리타를 그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여인의 왼팔에 둘러진 밴드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RAPHAEL URBINAS)’라는 서명을 남기고 있다거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비너스를 상징하는 은매화나무와 세속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모과나무처럼 그림 곳곳에 배치한 의미심장한 세부 요소들을 통해 작품의 모델이 화가와 사랑하는 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나 종교화 속 여성들과도 매우 닮아 있어, 둘이 매우 가까운 연인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라파엘로를 매우 존경했던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는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라는 작품을 1814년에 남기기도 했다. 앵그르의 그림 속 라파엘로는 작업실에서 <라 포르나리나>를 그리던 도중 자신의 모델이자 연인인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
 
라파엘로가 서른일곱에 요절하기까지 로마에서 12년 동안 둘은 계속 사랑을 나눠 왔으나, 끝내 결혼하지 못한 것에는 교황의 총애를 받아 추기경 후보로까지 거론된 라파엘로와 평범한 제빵사의 딸인 그녀의 신분 차이, 그리고 결혼을 구속이라 생각했던 라파엘로의 예술가적 기질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신분 차이 때문에 정부 취급을 받으며 라파엘로의 생애 내내 가려져 있던 그녀지만, 라파엘로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한 유일무이한 연인으로서 그녀는 대가의 작품들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라 포르나리나>, 라파엘로, 1518~1519  /  <라파엘로와 라 포르나리나>, 앵그르, 1814
 
 
(게재된 글은 백영주의 '세상을 읽어내는 화가들의 수다'에 수록되었으며 저작권은 백영주에게 있고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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