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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오디세이_펜슬리즘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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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에 새로운 위상을 제시하는 ‘펜슬리즘’
 
몸과 손, 머리가 하나가 되는 원초적이고 치열한 드로잉
- 무의식에 가까운 재료로 그려낸 작가의 작품세계
- 가장 단순한 재료로 돌아간 ‘미니멀리즘 추상’
- 소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흔치 않은 기획 그룹전
 


갤러리밈에서 기획하고 4명의 중견 작가가 참여한 드로잉 전시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펜슬리즘(Pencilism)’이라는 새로운 이름 하에 김범중, 문기전, 박미현, 표영실 작가의 각기 다른 연필화를 관람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연필화 전시 이다.
 
연필은 흔히 작업의 밑작업 또는 노트 구석에 그리는 낙서의 재료로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스스로를 펜슬리스트(Pencilist)라 칭하며 재료에 대한 애정을 들어낸다.
 
이들은 연필을 가장 직관적이고 무의식에 가까운 재료라고 소개한다. 손에 들어가는 힘과 숨결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 순간을 수행하듯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_갤러리밈 전시전경. 촬영 갤러리밈
 
갤러리밈에서 3번째로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김범중 작가는 끝없이 퍼져나가는 음파와 우주의 조화를 연필선으로 시각화 한다. 정교한 선의 반복은 캔버스 화면 밖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면서도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음파를 시각적으로 건져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엄격한 규칙에 따라 그려진 기호처럼 보이기도 하고 역설적으로 친근한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 강렬한 흑백 대비의 박미현 작가의 작품은 플라톤의 요소론에 영향을 받았다. 마티에르가 느껴질 정도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흑연은 그 자체로 묵직한 울림을 준다.

문기전 작가의 작품은 손끝의 흔들림까지 담은 수행적인 연필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에는 ‘나에겐 왜 이렇게 보여지고, 생각되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세계관의 무게가 그대로 들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안과 밖, 나와 너 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표영실 작가는 추상적인 감정이 연필의 농담 끝에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섬세하고 선이 얇은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특유의 눈물이 터지기 직전의 감정 상태를 상기 시킨다. 누구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모호한 감정을 깔끔하게 마무리하여 전시된 작품들은 한편의 시를 이미지화 한 것 같은 감상을 준다.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_갤러리밈 전시전경. 촬영 갤러리밈
 
이번 전시를 통해서 연필이라는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특색을 담아낸 작품을 선보이는 4명의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 연필화의 독자성과 새로운 위상을 확인 할 수 있다. 7월 19일 일요일까지.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展 작가 약력

▶ 김범중 Kim Beomjoong
 

김범중_Phrase_장지에 펜슬_각10x50cm_2020
 

학력
고려대학교 조형예술전공 학사
고려대학교 미술교육전공 석사
 
개인전
2019 D u r a t i o n, 갤러리 밈, 서울
2018 phase haze, 갤러리 조선, 서울
2017 Impedance, 아트 팩토리, 서울
2016 FLATRUM, 자하미술관, 서울
2015 Stereodium, 갤러리 담, 서울
2014 Distortion, 갤러리 담, 서울
2013 Sonoration, 관훈 갤러리, 서울
 
단체전
2020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 갤러리밈, 서울
2019 Moreless, 갤러리 담, 서울
2019 가는 파장, 수애뇨 339, 서울
2018 Oscillo, 갤러리 밈, 서울
2018 Da CAPO, 갤러리 담, 서울
2018 MONOROOM, 아트팩토리, 서울
2018 신몽유도 - Drawing After Dreaming, 자하미술관, 서울
2017 Color of Abyss, 복합문화공간 EMU, 서울
2017 Discreet Music, 갤러리 담, 서울
2017 Dream on Drawing, 자하미술관, 서울
2016 Da CAPO, 갤러리 담, 서울
2016 모노크로마, 이목화랑, 서울
2015 shall we, 갤러리 담, 서울
2015 Affinity 90, 갤러리 조선, 서울
2015 Black'n Drawing, 갤러리 비원, 서울
2014 The Drawing Room, 갤러리 조선, 서울
외 다수


▶ 문기전 Moon Kijeon


문기전_Q-piece 40_판화지에 펜슬_20x63cm_2019
 

 
학력
홍익대학교 동양화전공 학사
 
개인전
2019 일련의 관계들의 조합 a set of relationships, 팔레 드 서울, 서울
2019 일련의 관계들의 조합 a set of relationships, 후 미술관, 강원 (강원문화재단)
2018 일련의 관계들의 조합 a set of relationships, gallery GaBi, 서울
2017 Pa-ramanu 원자 너머에, art space grove, 서울
2015 기정사실(旣定事實) fact accompli, 갤러리 그림손, 서울 (서울문화재단)
2012 silent, 갤러리 a-cube, 서울
2010 세상 끝 조우, Seed 갤러리, 수원
2008 Fuman story shop. 갤러리 소미, 서울
2007 살아가야하는데..., greemZip, 서울, 갤러리 하루, 제주

단체전
2020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 갤러리밈, 서울
2020 1/25초의 사이, DTC 아트센타, 대전
2019 양자의 세계, 이화여자대학교 양자나노과학 연구단, 이화여자대학교 협력관, 서울
2019 문득 꽃, 아이 갤러리, 서울
2019 1cm의 세계, 1m의 풍경 2인전, 팔레 드 서울, 서울
2019 Intersection 교차지점, 예술공간+의식주, 서울
2019 화랑미술제2019, 코엑스 아트홀, 서울
2019 이른 꽃, 도로시살롱, 서울
2019 2019상상번지점프, 한벽원미술관, 서울
2018 AHAF seoul2018, 서울
2018 색(色), 존재를 깨우다, 아정미술관, 서울
2018 후용아트페허, 후미술관, 강원도
2018 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다, 안강병원, 서울
2017 얼굴 그 너머, 샘표 스페이스, 경기도
2017 HEXAGON : 경계를 넘다, 조선대학교 미술관, 광주
2016 우리 시대의 유산, 양평군립미술관, 경기
2015 벚꽃, UM 갤러리, 서울
2015 화가畵歌 : 경계의 자리, 한원미술관, 서울
2015 트라우마의 기록,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경기도
2013 자연을 바라보는 세가지 시선, 구로 아트밸리갤러리, 서울
2013 Asia Contemporary Art show, JW Marriott Hotel, Hong Kong
외 다수


▶ 박미현 Park Mihyun


박미현_07_보드지에 펜슬_40X50cm_2014


학력
덕성여자대학교 서양화전공 학사
덕성여자대학교 서양화전공 석사
 
개인전
2014 圖-形, 갤러리 담, 서울
2011 On overgrown paths, 갤러리 담, 서울
2010 練 習, 플랫폼 플레이스 629, 서울
2006 밤, 백 개의 별, 가람화랑, 서울
1999 눈, 덕성여대 유리갤러리, 서울
1998 박미현 개인전, 관훈갤러리, 서울 (정경자미술문화재단)
 
단체전
2020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 갤러리밈, 서울
2019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더 적음, 더 많음, 여수엑스포 전시홀, 여수
2019 素畵-한국 근현대 드로잉, 소마미술관, 서울
2018 사루비아다방 기금마련전, 사루비아다방, 서울
2015 소마미술관 소장품전-표정과 몸짓, 소마미술관, 서울
2014 사루비아다방 기금마련전, 갤러리누크, 서울
2014 Over no limit-이인현, 박기원, 김형관, 박미현, 갤러리소소, 파주 헤이리
2014 Love minus zero-이인현, 박기원, 김형관, 박미현, 갤러리 소소, 파주 헤이리
2011 사루비아다방 기금마련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2011 內角 internal angle, 갤러리소소, 파주 헤이리
2010 2010 아시아프 기획전-태양은 가득히, 성신여대, 서울
2010 Wonderful Fictures, 일민미술관, 서울
2008 겹-최병소, 박기원, 박미현, 소소갤러리, 파주 헤이리
2006 소마미술관 드로잉센터 개관기념전-잘 긋기, 소마미술관, 서울
2006 대한민국청년비엔날레,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구
2006 多色多感, 잔다리갤러리, 서울
2006 Pre-국제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천
2006 여섯 개 방의 진실, 사비나미술관, 서울
2005 순간에 선 시선, 우림갤러리, 서울
2005 서울청년미술제 “포트폴리오 2005”,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0 얼굴. 낯. 면, 도올갤러리, 서울
2000 SPACE 419, 한전프라자갤러리, 서울
2000 인간의 숲-회화의 숲,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광주
외 다수
 

▶ 표영실 Pyo Youngsil


표영실_경계의 사람들_종이에 펜슬_28x35cm_2020


학력
덕성여자대학교 서양화전공 학사
덕성여자대학교 서양화전공 석사

개인전
2020 잠깐 내려앉은 온기에 살갗이 한 겹 녹아내린다, 에이라운지 갤러리, 서울
2019 둥글고 투명하고 무거운 것들, 담 갤러리, 서울
2018 서성이고 더듬거리다, 담 갤러리, 서울
2016 검은 밤, 이목 화랑, 서울
2015 반투명, 스페이스 비엠, 서울
2013 중간, 갤러리 담, 서울
2011 반영(反影) : 입방체-집-달-인물, 대우증권 역삼역 갤러리, 서울
마찰 없는 마찰, 미고 갤러리, 부산
2010 난처한 모양, 갤러리 담, 서울
2009 얼룩, 가 갤러리, 서울
2007 말랑한 밤, 갤러리 담, 서울
2006 사소한 일, 가일 미술관, 청평
2004 소리 없는 방, 대안공간 풀, 서울
1999 즐거운 각성제, 관훈 갤러리, 서울

단체전
2020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 갤러리밈, 서울
2020 Da CAPO-2020, 담 갤러리, 서울
2018 누크갤러리 살롱, 누크 갤러리, 서울
2016 거울아. 거울아. 스페이스 몸 미술관, 청주
2015 보이는, 보이지 않는 - 박원주 표영실 2인전, 누크 갤러리, 서울
2015 Shall we dance, 갤러리 담, 서울
2014 The end is near, 갤러리 화이트블럭, 파주
2012 共生共樂, 갤러리 화이트블럭, 파주
2012 판타스틱 미술백서, 꿈의숲 아트센터 드림갤러리, 서울
2012 YMCA+YWCA, 갤러리 이마주, 서울
2012 아트 쇼 부산, 벡스코. 부산
2012 High Times, Hard Times – 객관화하기, 인터알리아, 서울
2008 pop eye, 아트갤러리 유, 부산
2007 夜動, 갤러리 룩스, 서울
2007 잉여의 시간, 더 갤러리, 서울
2006 다색다감, 갤러리 잔다리, 서울
2006 광주비엔날레 열린아트마켓,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
외 다수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展 전시 비평글 중 일부

이선영(미술평론가)
펜슬리즘 - 선과 함께 떠나는 여정
 
갤러리밈이 기획하고 4명의 중견 작가가 참여한 ‘DRAWING ODYSSEY-The Pencilism’ 전은 각 작가의 드로잉을 오디세이의 여정으로 간주한다. 작가 별로 다른 역에 도착한 것 같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던 길 멈추고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밀도감이 공통적이다. 인생과도 비교될 수 있는 선의 여행과 함께하는 동반자는 연필 한 자루다. 유목민의 지혜가 알려주듯, 떠나는 자의 짐 꾸러미는 가벼워야 한다. 삶의 편리를 보장해 준다고 믿어지는 점점 늘어나는 짐 꾸러미 때문에 떠나기 힘든 시대는 여행을 원점으로 회귀할 따름인 아늑하고 안전한 소비 품목으로 변화시켰다. 예술은 제자리에서도 가능한 여행이다. 가상현실 기술도 그와 유사한 체험의 제공을 약속하지만, 게임 참여자의 역할은 수동적이다. ‘손가락이 아닌 손의 감각’(들뢰즈)을 되살리기 위해 스크린에 직접 쓸 수 있는 플라스틱 펜도 있지만, 그 둔탁한 감도는 펜슬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다.
 
그 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종이와 펜슬은 현대적 가치를 반성하는 근본적 과제수행에 적합해 보인다. 펜슬 드로잉만으로 꾸려진 이 전시는 기본과 실험을 연결시킨다. 연필 또는 샤프펜슬은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그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이 있는, 즉 누구나 인생 초반기에 손에 잡아봤던 것이다. 매체가 소박하다고 결과물까지 소박하지는 않다. 생산수단의 감축은 포괄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의 미니멀리즘인 셈이다. 오랜 연마에 의해서 손의 연장처럼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필력은 감춰진 에너지나 무의식의 발현(김범중, 표영실)부터 주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모델(문기전, 박미현)까지 이른다. 각 작품들은 아득한 시공에서 발생한 파동의 리드미컬한 반향(김범중)부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한 형식(박미현) 까지, 경계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삶의 게임(표영실) 부터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험적 도해(문기전) 까지 다양한 차원을 아우른다.
 
작업, 특히 드로잉은 머리 뿐 아니라 몸과 손을 통과해야 하는 원초적이고도 치열한 과정이다. 그렇지 않으면 드로잉은 단독으로 서 있을 수 없다. 예술작품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족성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한 듯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지만, 지우개로 지워진 것조차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작에 마지막이, 마지막에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정한 게임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의 유희는 무한하다. 거듭해서 떠남은 예술의 조건이다. 완성된 작품이 하나 있을 때마다 거기에는 새로운 출발이 있다. 선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또한 포함하는, 샛길과 우회로 가득한 미로 속에서 나아감은 역행이나 회귀이다. 우주같이 막막한 시공간에도 웜홀이나 블랙홀, 화이트홀 같이 도약과 비약, 가속과 감속을 허용하는 특별한 길이 있다.
 
자유를 원하는 예술가는 그 누구라도 구조의 우연한 결정체에 불과한 주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이질성(몸, 무의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종이와 펜슬은 해부대와 칼을 연상시키는 분석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념무상의 수행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작업은 (재)발견의 장이기도 하며, 생성의 장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가 하면 우주적 질서에 대한 비유가 되기도 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서로를 비추고 공명한다. 종이와 펜슬은 그림에 한정되기 보다는 그림을 포함한 언어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던 시기의 매체로 주목된다. 인간이 되기 위해 걸음마 훈련이 있다면, 손에도 그에 상응하는 단계가 있지 않겠는가. 현대의 혁명적 정신분석학이 지배적 구조로의 환원보다는 탈피와 변형을 강조하듯이, 현대 예술 또한 언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실험적 장으로 삼아왔다. 그것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든 말든 간에, 언어의 변화는 인간과 세계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 선택된 종이와 펜슬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매체는 자연스러운 어법에 적합하다. 방금 꾼 꿈을 바로 적어 넣을 수 있는 순발력 있고 융통성 있으며, 언제나 쉽게 접근 가능한 이 매체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계속적인 실행을 통해 점차 분명해질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 작품 속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지는 펜슬의 궤적은 몸에서 실을 빼내는 누에나 거미 같은 자연스러움 마저 보인다. 물론 예술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의식화된 자연이며, 더 적절한 비유로는 언어이다. 가장 이상적인 언어는 모국어이다. 모국어가 우연찮게 세계 보편 언어가 된 국가의 국민은 근대를 선점한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적 헤게모니를 계속 유지했다. 종이와 연필은 한국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국어와의 비교는 다소 과장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혁명적 정신분석학자는 ‘모국어라는 한 지역 내에서 형성된 언어의 통일성조차 항상 어떤 권력구성체와 분리할 수 없다’(펠릭스 가타리)고 본다.
 
작가에 따라서는 미술대학에 가기/다니기 위해 배운 것을 애써 잊어야만 하는 씁쓸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끼어드는 것(기구, 제도 등)이 많을수록 본질은 희미해진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종이와 펜슬은 여러 미술도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각 작품들은 펜슬이 본질의 탐구에 있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객과의 거리도 단축시켜준다. 관객도 종이와 펜슬이 주는 감각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DRAWING ODYSSEY_The Pencilism>展 작가별 전시 비평글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범중 ; 일파만파(一波萬波)하는 내재적 리듬
 
얇은 띠 형태가 길쭉한 화면에 담겨 다양한 파동으로 굽이치는 작품 [Phrase]는 따로 또 같이 작동한다. 파동은 입체감 있는 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표면과 이면이 수시로 바뀌는 민감한 표면은 마치 대지 깊숙한 곳에서 발생한 요동을 파동으로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자신이 속한 환경을 민감하게 반영할 것이다. 현악기 같은 비율을 가진 화면은 악기의 음이나 그에 상응하는 구음을 연상시킨다. 같은 크기로 나란히 배열된 화면은 그자체가 분절화 된다. 그것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설치방식으로 확장 될 수 있다. 그러나 화면 안의 형태는 어느 지점에서 잘려도 자연스러운 나풀거림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이 유연하다. 다섯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또 다른 작품 군은 각기 진행 중인 상태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것 같은 확장성을 가진다. 단편으로 전체를 암시하는 방식이다. 동심원으로 파가 퍼져 나가는 형태 좌우로 두께와 명암이 다른 기둥 모양으로 배열된다. 거기에는 악기를 모델로 한 작품 특유의 시각적 울림, 즉 공(共)감각이 있다. 마치 지문처럼 섬세하게 새겨진 선들은 마주치는 면에 짙은 협곡을 만든다.
 
소리/형태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협곡은 또 다른 선을 이룬다. 그것은 점과 점이 만나는 기하학적 선의 정의를 초월한다. 그의 작품은 넷 또는 다섯이 시리즈처럼 제시되어 있지만, n개의 패널로 증식될 수 있다. 그림처럼 나란히 거는 것은 여러 배치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무한한 시간의 축을 따라 다르게 접혀지고 펼쳐지는 주름은 실재의 다양성에 대한 은유이다. 같은 모양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선의 간격과 배치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그것이 음악이라면 차이의 세계에 대한 찬미가가 될 것이다. 쓰기의 도구이기도 한 연필은 모든 텍스트에 내재한 차연의 세계 또한 암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같은 리듬과 박자를 강요하곤 한다. 그래야 생산/소비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논리에서 예술을 포함한 모든 섬세함은 묻혀 버리기 일쑤이다. 동일성의 논리로부터 탈주하려는 현대철학자들은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들뢰즈와 가타리)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물리학자들 또한 변화의 순간에서 원자 운동에 내재한 작은 변이 또는 요동을 강조한다.
 
펜슬로만 이루어진 형태는 분자들의 배열 상태만 달리 함으로서 존재들 사이의 변환을 보여준다. 선의 밀도와 강도, 방향의 차이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의 순간과 비교될 수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고체 액체 기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우주의 창조성으로 보면서, 이러한 현상을 사회에도 적용하고자 한다. 필립 볼에 의하면 상전이의 핵심은 계 전체를 통해서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것은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협력 때문이다.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필립 볼)는 우주에 편재하는 질서의 표현이다. 김범중의 작품에서 전이의 질서는 형태와 소리로 번역된다. 일찍이 고대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파동)와 음의 연결로 천체의 조화를 말했다. 근대과학은 고대의 질적 우주를 수량화했지만, 정교한 시계와 비교된 근대적 우주에서 소리는 여전히 우주적 조화에 대한 상상 속에 울려 퍼진다.
 

김범중_Oscillo외_장지에 펜슬_각20x100cm_2019

 
▶문기전 ; 인식의 불확정성, 또는 자유
 
문기전은 ‘최소 에너지 단위이자, 저장 공간으로 형상화시킨 Quantum 이미지’를 비롯해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하며, 기억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나에겐 왜 이렇게 보여 지고, 생각 되는가’와 관련된 가설적 구조는 사각형 안의 사각형, 원, 먼지처럼 흩어지거나 뭉치는 입자 등으로 나타나며, 때로 눈 코 입 같은 해부학적 기관의 일부들과 연결망을 이룬다.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중시하는 문기전의 작품에서 작품과 작품 간의 배치 또한 중요하다. 비슷한 시각 상을 가지는 것들은 시리즈처럼 보이고 때로 다른 종류와 조합되어 작동된다. 작품 하나하나가 일련의 단위 구조가 되어 조합되면서 세상이 인지되고 의미화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판화지 위에 펜슬로 그려진 형태들은 분석적이며, 과학적 도해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은 해부학도 생리학도 로봇의 설계도면도 아니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이해방식과 관련된 일종의 은유적 다이어그램이다. 빛의 잔상 시리즈는 명암과 비율의 차이로 계열화된 직사각형들을 보여준다.
 
사각형 안의 사각형이 기본 형식인데, 흑연의 입자가 퍼져 나가는 식이므로 경계선을 정확하게 확정지을 수 없다. 가운데가 어두운 경우와 바깥이 어두운 경우로 나뉜다. 시각적 관습 상 가운데는 형태, 바깥은 배경으로 간주된다. 중심의 짙은 사각형이 커지면 밝은 배경은 줄어들고, 중심의 밝은 사각형이 줄어들면 어두운 배경의 비중은 커진다. 명/암, 중심/주변 등 구별되는 항은 연동된다. 사각 구조와 달리 먼지 형태의 분포로 빛의 잔상을 표현한기도 한다. 하얀 종이 배경 안에 점이 번져 만들어진 얼룩들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먼지입자가 뭉쳐지거나 흩어져서 별이 생성 소멸되는 우주의 풍경부터 거듭하여 확대된 미시세계의 흐릿한 모습까지 다양한 형태가 연상된다. 원이나 사각형처럼 비교적 분명한 도상 또한 경계가 모호하다. 경계는 선이 아니라 입자로 되어 있기에 불확정적이다. 불확정적이라고 해서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도 아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불(不)-’로 시작되는 불완전성(괴델), 불확정성(하이젠베르크) 등의 개념은 엄밀한 인과론 보다는 확률과 통계에 의지한다.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을 미술과 비유하자면 반(反) 형식주의에 가깝다.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라는 사고를 고집하지 않는다면, 결정론보다는 확률론이 좀 더 위로를 주고, 전통/근대를 넘어선 현대와도 조응한다. 단독으로도 다른 작품들과의 조합으로도 나타나는 작품 [Quantum]은 100x100cm 크기의 정방형의 판화지 위에 원이라는 응집력 있는 형태가 자리한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경계는 흐릿한데, 여기에서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는 전이의 지대로 오차와 우연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작품 [청각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은 귀라는 감각기관과 연결된 망으로, 최종적으로 검은 [Quantum]과 연결 된다 시각, 후각, 미각도 마찬가지 과정이다. 의미 또는 해석으로 전환될 자극의 주요 통로들은 [오감 정보 수집 및 저장 과정에 관한 드로잉 작업]으로 배치된다. 그의 작품에서 펜슬은 분석과 종합의 과정의 표현에 딱 맞는 듯하다.
 

문기전_Quantum_판화지에 펜슬_100x100cm_2019


▶박미현; 객관적 실재에 대한 이상적 관념
 
보드지에 샤프펜슬로 그린 같은 크기의 작품들은 그 정교함에 있어 펜슬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러한 경지가 가능할지 싶다. 흑백 선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너무 엄격하고 세밀해서 기하학적 도형이나 도면같은 면모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보기 위한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번에 그어진 선 또는 수없이 그어진 흑연에 의한 반사면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지만, 그것들이 풍경처럼도 보인다.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원을 이어주는 수평의 선과 사선에 중력감이 있기 때문이다.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하얀 원두 개는 일월도(日月圖)처럼 안정감 있게 이 우주를 비춰준다. 그런 비유라면 허공의 도형 또한 중력과 무관치 않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와 달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모두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양 말단에 같은 모양의 도형이 있는 세 개의 밝은 기둥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은 시작도 끝도 같은, 변치 않는 규칙적 여정을 연상시킨다.
 
한 화면 내에서, 또는 다른 작품들과의 관련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박미현의 작품에는 흑백 반전의 관계가 자주 나타난다. 흑/백, 네거티브/포지티브 스페이스, 상하좌우, 수직과 수평선은 기하학이 토지 측량술에서 나왔듯이, 풍경이나 중력감이 배어 있다. 검은 바탕에 하얀 창문이 연상되는 도형이 있는 작품에서, 통로가 만나는 지점에 배치된 원들은 정지 가운데 움직임이 잠재한다. 흑백 반전 버전의 작품에서 반사광 때문에 제자리에서 팽글팽글 도는 느낌을 주는 교차 면의 원들은 사각형의 각도를 유연하게 해줄 것이다. 대칭적 형태는 만다라처럼 평안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다소간 디자인적 요소가 있는 박미현의 작품들은 아름다움이 기능의 먼 흔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기능주의 미학을 낳기도 했지만, 기능은 모더니즘이 선전한 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았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지상에 단단히 서있기 위한 공학적 방법은 그 합리성에 있어서 예술이 담아낼 수 있는 내용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틀과 표면의 물리적 관계를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서 그림의 형식적 조건을 실험하려던 유파는 미술사의 한 장을 이룬다. 박미현의 작품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이미지에 대한 선호는 보다 정신적 연원을 가진다. 작가는 플라톤이 ‘우주의 생성을 요소론으로 설명하려 한 내용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다’고 밝힌다. 막스 야머의 [공간개념]에 의하면, 플라톤에게 물리학은 기하학이 된다. 플라톤은 원소들이 특정한 공간적 구조들을 지닌다고 여겼다. 가령 플라톤은 정이십면체의 공간적 구조를 물에게 부여했고, 정팔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공기에게, 정사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불에게, 정육면체라는 공간적 구조를 흙에게 주었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흙은 정육면체 형태를 지니기 때문에 네 원소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밑면들을 지닌다. 다섯 개의 정다면체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관념을 상징한다. 이데아가 실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이데아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자의성에 좌우되지 않는 어떤 든든한 근원에 대한 욕망은 과학자 뿐 아니라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준다.
 

박미현_04_보드지에 펜슬_40X50cm_2014

 
▶표영실;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잠깐 내려앉은 온기에 살갗이 한 겹 녹아내린다’같은 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표영실의 작품에서 언어적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전시와 함께 발표되곤 하는 단상들이 위의 전시 부제처럼 문장으로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반복되는 마찰로 생긴 주름’, ‘앞을 볼 수 없어서 더듬대는 것’, ‘접힌 채 기울어지고,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바퀴벌레 등짝 같은 얼굴들’ 등이 그러한 예다. 그러한 미완성의 문장, 또는 단상에는 시각적 상상력이 풍부해서 작품 제목으로 붙인다면 이미지와 단어의 밀착도는 매우 높을 것이다. 물론 ‘부드러운 바람에 상처가 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 넘기는, 슬픔’같이 추상적인 차원도 있다. 단어 또는 문장의 긴 목록을 훑어보자면, 표영실은 평소에 그리기만큼이나 많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말과 사물의 관계가 그렇듯,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말로 충분하다면 열심히 그릴수록 (예술적 난관까지는 아니더라도)삶의 난관에 부딪히는 화가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만약 그림으로 충분하다면 작품을 깍아 먹을 수도 있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말보다 더 완벽하고 충만하다는 믿음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펜슬이라는 매체는 상보성을 가지는 말과 이미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언어는 선형적이다. 단어들이 한 줄로 배열되기 때문에 아무리 함축적이어도 이미지에 비해서 단정적이다. 가령 ‘얼굴에 붙은 가면’이라는 단상은 정말 가면처럼 보일정도로 단순하고 얇은 표영실의 인물상을 설명해 해준다. 얼굴 방향과 눈구멍 방향이 다른 가면을 쓴 듯한 얼굴도 보인다. ‘뜨고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또는 눈동자 없이 퀭한 눈구멍은 가면과 얼굴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의 소외된 어떤 상태를 보여준다. 본질/가상의 이분법이 무화되면, 얼굴은 없고 가면들만 남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할만한 가짜들의 세상이다. 지우개로 쉽게 지워지는 펜슬은 이러한 가변적 존재들과 어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은 어떤 형태를 확정짓는 경향이 있다.
 
외곽선을 모호하게 하는 흑연 입자의 흩어짐이나 경계를 가로지르는 누런 액체의 표현 등은 인물/인체의 표현에 강렬한 감정을 싣는다. 인체 모양이 액체로 변하는 작품 [상실의 무게]를 비롯하여 사지가 다 잘려나가고 몸통만 남은 손목에 체액이 흐르는 작품 등이 그렇다. 감정은 대개 넘치거나 터져 나온다. ‘아무렇게나 뭉개진 물렁물렁한’, ‘찐득하고 더러운 눈물’은 주체도 대상도 아닌 경계위의 것이다. 이 분류 불가능한 것은 인류학, 심리학, 문학 등에서 ‘비천’(abject)하다고 명명된다. 작품들의 면면은 상처, 우울, 공허, 고독, 자학, 불안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이다. 작가의 실제 성격이 그렇다기 보다는, 펜슬을 쥐었을 때의 자의식과 관련될 것이다. 외향적이고 밝은 성격이라도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써 있는 문장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호한 감정/상태마저도 깔끔하게 마무리한 작품들은 작업이 작가에게 미쳤을 긍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완벽하게 표현된 것, 즉 조리 있게 정리된 것은 사태의 잠정적 해결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표영실_상실의 무게_종이에 펜슬_38x28cm_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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