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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로트렉 展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

Toulouse-Lautrec 'A Little Giant of Moulin Rouge'

  • 작가

    툴루즈 로트렉

  •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 주소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서초동) 예술의전당

  • 기간

    2020-01-14 ~ 2020-05-03

  • 시간

    10:00 ~ 19: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연락처

    02-543-7770

  • 홈페이지

    http://www.sac.or.kr

  • 초대일시

  • 관람료

    일반 15,000원 / 중고생 12,000원 / 어린이 10,000원

갤러리 가기
후기인상주의 화가이자 현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전시회가 2020년 1월 14일부터 5월 3일까지(96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툴루즈 로트렉 전은 국내에서 선보이는 로트렉의 첫번째 단독전으로,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헤라클레이돈 미술관(Herakleidon Museum)이 소장하고 있는 15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전시작품 모두가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이다.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툴루즈 로트렉은 19세기 후반, 예술의 거리 몽마르트와 밤 문화의 상징 물랭 루즈 등을 무대로 파리 보헤미안의 라이프 스타일을 날카롭게 그려낸 프랑스 화가이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포스터, 석판화, 드로잉, 스케치, 일러스트 및 수채화들과 로트렉의 사진 및 영상, 이 시대의 생활용품 등은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을 19세기말 생동감 넘치는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과 물랭 루즈로 안내해 줄 것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 중, ‹제인 아브릴 Jane Avril, 1893›, ‹아리스티드 브뤼앙 Aristide Bruant in his Cabaret, 1893› 등 포스터 작품들과 ‹배에서 만난 여인 The Passanger from Cabin 54, 1895› 등 석판화 작품들, 연필과 펜으로 그린 스케치 작품들, ‹르 리르(Le Rire)›, ‹라 레뷰 블랑슈(La Revue Blanche in 1895)› 등 잡지에 게재된 그래픽과 풍자 일러스트 등은 화가 툴루즈 로트렉을 대표하는 이미지이자, 19세기 말 파리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 La Belle Époque)의 상징들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전시회에는 로트렉의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로트렉의 드라마틱한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과 미디어아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의 일러스트 등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으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회이다.
이번 전시회는 2007년부터 그리스와 미국, 이탈리아 등지에서 순회 전시 중이며, 이번 서울 전시회는 14번째 전시이다.
 
툴루즈 로트렉은 그가 주로 활동했던 프랑스 파리나 19세기말의 시대를 넘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가다. 37년의 짧은 생애동안 5,000여점의 작품을 남긴 로트렉은 몽마르트의 작은 거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이기도 하다.

 
□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150여점의 작품

전시 특징 ① Time Slip
                 예술가들이 사랑한 물랭 루즈로의 타임슬립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과 흥미로운 전시 디자인으로 프랑스 파리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인 벨 에포크 시대,
                 그 중에서도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흥겨운 물랭 루즈 속으로 관람객들을 이끕니다.

전시 특징 ② Poster Stories
                 포스터가 들려주는 툴루즈 로트렉 이야기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툴루즈 로트렉의 기발하고 재미있는 31점의 포스터를 보면서,
                 포스터 곳곳에 숨어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친절한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전시 특징 ③ Archiving
                 살아 숨쉬는 천재 예술가의 흔적

                 동시대의 예술가들도 인정했던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이 게재된 실제 인쇄물의 아카이빙 전시를 통해 그의 숨결과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전시 특징 ④ Video & Media Art
                 짧은 삶과 그의 작품들 그리고 물랭 루즈
                 툴루즈 로트렉의 짧았지만 언제나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과 후대에도 영감을 줬던 작품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 물랭 루즈에 대한 특별 제작 영상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합니다.


□ 툴루즈 로트렉의 삶과 작품 세계 1864. 11. 24 ~ 1901. 9. 9

1. 벨 에포크 La belle époque (1871 ~ 1914)

1871년, 보불전쟁(Franco-Preussen War)이 끝나고 프랑스에는 모처럼의 평화와 풍요가 찾아온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대로 불리는 ‘벨 에포크’가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파리에는 산업과 예술과 문화가 번창했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Eiffel Tower)이 세워지고, 최초의 파리 지하철이 개통됐다. 무엇보다 벨 에포크를 대표하는 예술 분야는 미술이었다.
피카소, 샤갈, 모딜리아니, 칸딘스키 등 유럽 각국의 화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고, 예술 표현이 굉장히 자유로워졌다. 다양한 서양미술 사조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탄생했고, 활짝 꽃을 피웠다. 그들 중에서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 폴 세잔, 반 고흐, 폴 고갱, 오귀스트 로댕 등 서양미술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작가들이다.
 
I don't belong to any school.                           나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I work in my corner.                                       나는 내 멋대로 그림을 그릴 뿐이다.
I admire Degas.                                             하지만 나는 에드가 드가를 존경한다.
* Henri de Toulouse-Lautrec                              *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2. 20세기 그래픽 아트, 포스터의 탄생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이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건, 18세가 되던 1882년 파리로 이주하면서부터다.
아카데미 화가인 레옹 보나(Leon Bonnat)의 화실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학문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후 보나가 화실을 닫자, 역시 아카데미 화가인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의 화실로 옮겼다. 이곳에 몇 년간 적을 두고 미술공부에 전념했지만, 로트렉은 에드가 드가나 화실에서 사귄 친구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세계를 동경했고, 진정으로 그들을 스승으로 생각했다.
1884년, 로트렉은 몽마르트(Montmartre) 언덕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몽마르트는 1880년경에 이르러 보헤미아니즘(Bohemianism),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지역이다. 로트렉은 이곳을 근거지 삼아 화랑과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친구들과 카페에 모여 토론하고, 작업실과 모델을 함께 쓰는 등 세기말 파리의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즐겼다. 이 시기 로트렉은 나비(Nabi)파 화가인 피에르 보나르나 에두아르 뷔야르, 후기인상주의 화가인 반 고흐 등과 자주 어울렸지만, 어떤 예술 유파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이론이나 운동보다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으로 자기 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근본적으로 로트렉은 야외의 자연 빛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인상주의와는 달리, 실내의 인공 조명을 선호했다. 이런 로트렉의 화풍은 물랭 루즈의 실내 조명 아래서 그린 모델들의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1889년, 몽마르트에 댄스홀 물랭 루즈(Moulin Rouge)가 오픈했다. 물랭 루즈는 열자 마자 바로 파리의 명소가 되었고, 유명 인사들이 드나드는 최고의 사교장이었다. 물랭 루즈의 개업은 로트렉의 작품세계가 큰 변혁을 맞는 계기가 된다. 로트렉에게 이 물랭 루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아뜰리에였고 그곳에서 펼쳐진 공연들과 사람들은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로트렉은 지정석을 두고 매일 밤 이 물랭 루즈를 드나들면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다. 로트렉에게 그림은 매일매일의 삶을 기록하는 일기장과도 같았다. 로트렉은 사람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눈과 빠른 손놀림으로 그가 만난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1891년 가을, 로트렉이 제작한 포스터 ‘물랭 루즈,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는 로트렉을 일약 파리의 유명인사로 만들어 준 작품이었다. 로트렉은 지금까지의 18세기적 포스터를 개념이 전혀 다른 대담한 표현과 기법으로 20세기적 그래픽으로 바꿔 놓았다. 이 포스터를 계기로 석판화(Lithography) 기법을 이용한 걸작 포스터와 판화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로트렉은 벨 에포크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It is fair to say that without Lautrec,                         로트렉이 없었다면
there would be no Andy Warhol.                             앤디 워홀은 없었을 것이다.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USA                    * 미국,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3. 천재화가 로트렉의 고독한 생애

툴루즈 로트렉은 프랑스 남부 알비(Albi)에서 백작의 작위를 가진 아버지와 사촌 간이었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났다. 기문의 계속되는 근친혼의 영향으로 그는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장애도 물려받았다. 14살과 15살 때 넘어져서 좌우 허벅지 뼈가 차례로 부러진 뒤로는 키가 거의 자라지 않았다. 결국 그는 137Cm(4피트6인치) 정도의 키에 하반신이 과도하게 짧은 모습으로 평생 지팡이에 의지한 채 살아야 했다. 이런 장애로 승마와 사냥을 즐기는 귀족의 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그는 그림 그리는 데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8살이 되던 1872년에 알비(Albi)를 떠나 파리에 가서 학교(Lycée Fontanes)에 입학했지만, 건강이 나빠져 1875년에 다시 알비로 돌아와 개인교습으로 교육을 마쳤고, 1882년 다시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거대한 저택에서 자란 로트렉은 가족, 하인, 가축, 사냥 장면 등을 끊임없이 그리면서, 대상의 형태나 움직임을 정확히 관찰하고 그 특징을 포착해 내는 능력을 길렀다. 일부 동물 그림을 제외하면 평생에 걸쳐 그가 집중한 대상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림의 모델은 모두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림 속에 각자의 개성이 잘 살아 있어, 그의 모든 작품이 그와 삶을 같이 한 사람들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카바레의 댄서와 가수, 매춘부와 서커스 단원의 모습 뒤에 가려진 인간적 비애를 그만의 미적 감각으로 표현하였다. 배우들과 댄서들의 생활에 지친 모습에 연민을 느꼈으며, 술집 손님들의 허식과 무지를 꿰뚫어 보았고 그들의 성격을 날카롭게 풍자했다. 그의 작품은 흥겹고 명쾌하며 독특하면서도 독창적이었다. 또한 로트렉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벽을 허물어버린 최초의 작가였다.
툴루즈-로트렉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다른 예술가와 비평가들의 인정도 받았다. 1883년에 첫 번째 그룹전에 참여한 이래 파리와 브뤼셀, 런던의 주요 전시들에 여러 차례 작품을 선보였고, 테오 반 고흐 등의 화상을 통해 그림 거래도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불규칙한 생활, 과음, 매춘부들과의 무분별한 교제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고, 1890년대 말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착란 증상과 기행이 심해져 1899년에는 몇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퇴원 후에도 작업을 계속하기는 했으나, 1901년에는 몸의 마비 증상까지 와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실려 가서 37세가 채 못 되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그만큼 드라마틱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남겼다. 통계에 의하면, 캔버스 유화 737점, 수채화 275점, 판화와 포스터 369점, 드로잉 4,784점이나 된다.


□ 주요작품 WORKS



아리스티드 브리앙 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 1893 | Lithography | 138×99cm



제인 아브릴 Jane Avril,  1893 | Color Lithography | 129×93.5cm



물랭 루즈, 라 굴뤼 Moulin Rouge, La Goulue 1891 | Color Lithography | 170×118.7cm



앰배서더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 Ambassadeurs. 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 1892 | Color Lithography | 138×96 cm




조르주 클레망소의 책 시나이 산기슭에서 Au Pied Du Sinaï 표지 | 1897



Elles (석판화 연작 中) | 1896 | Color Lithography




Cavalier | 1879 - 1881 | Ink Drawing



Le Jockey 1899 | Color Lithography | 51.1 x 35.5 ㎝




Polaire (Le Rire 잡지) 1895 | Color Lithography | 26.2 x 12.2 ㎝



□ 전시 구성 EXHIBITION SECTIONS

Section ① 연필 드로잉

연필은 툴루즈 로트렉의 평생 친구였다. 로트렉은 늘 연필을 지니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장소, 상황에 따라 떠오르는 영감을 끊임없이 드로잉 했다. 로트렉은 연필과 펜으로 그리는 스케치나 드로잉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바로바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느꼈으며, 유화와 판화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여겼다. 그는 평생 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원칙처럼 지켰다.
로트렉의 연필은 어린 시절 다리가 부러진 후 오래 침대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충실한 동반자였으며, 삶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사이 작은 형태의 일탈로도, 세계를 보고 해석하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했다. 친구인 반 고흐(Van Gogh)도 로트렉과 거의 같은 운명을 경험했듯이, 1899년, 그가 3개월 정도 수용되어 있던 정신병원을 탈출하기 위한 열쇠를 정확히 찾아내는 유쾌한 공범이기도 했다.
드로잉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얼굴, 포즈, 실루엣, 캐리커처 등의 스케치이다. 이 섹션에서는 놀랍도록 현대적이고 절묘한 로트렉의 연필과 펜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연필을 놀려 사물을 묘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연필 드로잉이 자신의 삶을 지지하는 원동력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로트렉이 17살 때 아버지를 그린 <알퐁스 드 툴루즈 로트렉(Alphonse de Toulouse-Lautrec) 백작의 초상, 1881년>과 로트렉이 자신의 노골적인 누드를 재치있게 표현한 작품 <툴루즈 로트렉 누드(Toulouse-Lautrec Nu), 1894년> 등 희귀한 드로잉 작품들도 선보인다.


Section ② 뮤즈

‘몽마르트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은 파리의 밤 문화를 화려하게 꽃 피워낸 몽마르트의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그가 화폭에 그들을 희극적으로 또는 비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그들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위선과 가식으로 똘똘 뭉친 상류사회를 조롱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그의 뮤즈들을 통해 화려했던 한 시대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파토스(pathos, 애수)를 정직하고도 진실한 이미지로 세상에 남겼다.
로트렉의 작품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하나는 도시의 밤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창작한 광고 포스터들이다. 로트렉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스타들을 다른 작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 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그려냈고, 연예인들은 이 포스터 덕분에 일약 스타로 떠오르기도 했다.
로트렉은 파리의 유명한 카바레 스타인 제인 아브릴(Jane Avril, 1868~1943)과 친분을 쌓았고, 그녀는 로트렉이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켜준 친구였다. 로트렉은 그녀를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1893년>라는 포스터에서 카페 콘서트를 관람하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그려 내기도 했지만, 다른 포스터 <에글란틴 무용단(La Troupe de Mile Églantine), 1896 년>에서는 다른 댄서들과 함께 자유롭게 캉캉 춤을 추는 모습도 보여준다. 로트렉이 제인의 옷을 입고 있는 유명한 사진(1892년)은 지금까지도 로트렉의 유머감각을 나타내는 불멸의 사진이 됐다. 이 의상은 주간지 ‘쿠리에 프랑스’가 주최한 여성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코스프레한 것이다.
로트렉의 포스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싱어송라이터 겸 샹송가수 아리스티드 브뤼앙(1851~1925)이다. 로트렉은 여러 작품에서 브뤼앙을 묘사했는데, <앰배서더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 1892>이라는 포스터에서 그는 풍성한 망토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는 브뤼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한 색채가 화면을 넓게 차지하게 구성한 로트렉 만의 독특한 현대적 감각은 예상치 못하게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배우이자 가수인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 1868‒1944)의 개성에 매료된 로트렉은 그녀에게 석판화로 표지를 만든 앨범을 헌정했다. 이베트의 트레이드 마크는 팔꿈치까지 덮는 길고 까만 장갑이었다. 로트렉은 제인 아브릴이 부각된 ‘디방 자포네’ 포스터를 그리면서 얼굴은 보이지 않고 길고 까만 장갑만 보이는 인물을 무대에 그려 넣음으로써 그녀가 바로 이베트 길베르임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 이베트의 이미지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형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도트렉의 그림 덕분이다.


Section ③ 몽마르트 카페

이번 섹션은 대중적인 카바레 쇼에서부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그리스의 비극이나 클래식 콘서트같은 고급스러운 공연에 이르기까지,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장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소개된다.
로트렉이 카페나 극장의 장면을 그린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는 일본의 목판화나 풍자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영향으로 빛과 그림자의 역동적인 대조 및 효과적인 움직임, 과감한 생략이나 단순화를 통해 드라마나 코미디의 강렬함을 표현한다. 또한, 로트렉은 인물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번 섹션에 소개되는 작품들에는 1893년 ‘르 카페 콩세르(Le café Concert)’ 컬렉션을 위해 제작된 웃음을 자아내는 석판화들도 포함돼 있다.
로트렉은 "어떤 쇼가 벌어지든 상관없다. 나는 언제나 극장에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런 로트렉이 쇼 비즈니스 세계에 발표하는 작품들은 언제나 매혹적이어서 파리지앵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전했다.


Section ④ 여자

현대 프랑스 문학의 경우(플로베르에서 모파상의 단편소설까지)와 마찬가지로, 추악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주제와 등장인물은 대개 예술로 대체됐다.
세기의 전환기 파리. 카바레의 화려한 무대 위에서 캉캉댄서들, 가수들, 코메디언들이 펼치는 퍼포먼스와 춤과 공연 덕분에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던 파리지앵들의 생활은 로트렉의 눈에는 그림의 아주 좋은 소재로 비쳐졌다. 그가 그린 여성들의 초상화는 아무런 과장이나 미화없이 보이는 대로, 아마도 그 이상 보다 더 진지하게 그려낸 그림들이다. 로트렉 이전에는 가수나 여배우 등 연예인들의 강요된 관능과 유혹 아래에 감춰진 억눌린 열정, 외로움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을 아무런 편견없이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성공한 예술가는 없었다.
1892년에서 1895년까지 3년 동안, 로트렉은 몽마르트의 유곽에서 일주일 내내 보냈다. 여기서 그는 몇 시간이고 여자들이 쉬고 있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손님을 기다리거나,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들과 함께 하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일상생활이 로트렉의 눈에는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프랑스 19세기 후반, 판화의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로트렉의 <엘르(Elles), 1896> 석판화 연작은 이런 환경을 바탕으로 탄생했고, 또한 이런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들이다. <엘르> 연작은 처음 발표된 이후로도 여러 차례 한정판 책으로 묶어 출판됐다.
로트렉이 그린 대표작 중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꿈’을 표현한 그림이 있다. 로트렉은 아프리카로 가는 배 위에서 이 신비한 여성과 마주쳤고 헤어졌다. 로트렉은 이 여성을 <54번 객실의 여행자(The Passenger in Cabin 54), 1896>라는 타이틀로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 냈다.


Section ⑤ 잡지와 출판

19세기 말 프랑스는 각종 잡지가 쏟아져 나온 매거진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 당시 파리 미술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로트렉은 여러 잡지로부터 원고청탁이 쇄도했다. 로트렉이 잡지를 위해 제작한 일러스트나 만화, 그래픽 디자인 등은 로트렉 예술의 중요한 영역 중 하나이다.
이 시기에 파리에서 출판되던 풍자 잡지 <르 리르(Le Rire, 비웃음>는 스타들의 밤문화를 비롯해서, 유명인사들에 대한 가십거리와 정치 풍자, 부패, 군대 스캔들에 초점을 맞춘 기사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로트렉은 이 <르 리르> 잡지에 풍자 그림을 자주 기고하는 단골 작가였다. 이 섹션에는 로트렉이 기고한 그림들과 잡지 실물 등이 소개된다.
1893년 로트렉은 무정부주의자인 조르주 다리앵(Georges Darien)이 편집한 주간지 ‘레스카 무슈 L’Escaramouche, 전투)'에 몇 편의 일러스트 작품을 기고했다. 이 작품들은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와 관련된 비극의 장면을 포함한 연극 주제들을 다루었고, 또한 정치 · 사회적 풍자의 이미지들을 다루었다. 로트렉의 아버지 알퐁스 로트렉 백작이 샌드위치를 마구 꿀꺽꿀꺽 삼키는 모습의 일러스트에 노골적인 캡션 "천박해! 진짜 천박해!"를 붙인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인물의 특징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통렬하게 표현해 내는 로트렉의 천재성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로트렉은 낮 생활의 대부분을 자신의 스튜디오와 잡지 <라 레뷰 블랑슈(La Revue Blanche>’의 사무실에서 지냈다. 화가들이나 작가, 음악가 또는 언론인, 학자들과 다양한 우정을 쌓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1895년, 로트렉은 <라 레뷰 블랑슈>의 광고 포스터를 편집자의 아내인 미시아 나탕송(Misia Natanson)을 모델로 디자인했다. 이 포스터는 파리의 큰 화제가 됐고, 미시아도 일약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됐다.
프랑스 공화국의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Eugéne Benjamin Clemenceau)가 쓴 책, <시나이 아래에서(Au Pied du Sinai>의 표지와 책에 실린 모든 삽화를 로트렉이 그렸는데, 이 작품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 커뮤니티의 삶을 블랙 유머로 묘사하고 있다. 처음 디자인한 표지와 3점의 일러스트는 당국에 의해 게재가 거부당했다. 이번 섹션에는 거부당한 작품 4점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이 일러스트들은 당신 프랑스의 정치 상황을 아주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풍자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섹션에서는 또한, 로트렉이 일생 동안 가장 열정을 쏟은 위대한 석판화(lithography)의 세계를 소개한다. 로트렉이 직접 제작한 석판화의 판석과 스케치 등을 통해 석판화 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창작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석판화 판석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바순 연주자인 데지레 디하우(Desiré Dihau)의 바순 연주 모습을 담은 작품 <당신께(Pour Toi!), 1893>가 새겨 있다.


Section ⑥ 말과 승마

로트렉의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타데 나탕송(Thadée Natanson)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앙리는 남성보다는 동물을, 동물보다는 여성을 좋아했다. 그는 미칠 정도로 말을 좋아했지만 말을 타지는 못했다.”
귀족들 틈에서 자란 로트렉은 말에 대한 열정이 컸다. 로트렉의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숙련된 기수였으며, 야외 활동을 좋아해 말을 타고 독수리를 데리고 오랜 시간 사냥을 다니곤 했다. 이 섹션의 그림 중 일부는 로트렉의 청소년기 작품들이며, 로트렉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1899년 봄, 로트렉은 알코올 중독과 과대망상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로트렉은 요양원에서 퇴원하기 위해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다양한 말의 드로잉을 그렸다. 석판화 <경마(The Jockey), 1899>는 이러한 작품 중 하나다.
1898년에 그린 <조랑말 필리베르(Pony Philibert)> 초상화도 이번 섹션에 소개된다. 그의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로트렉의 상태는 크게 악화되었고, 점점 더 움직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로트렉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많은 말들 중 마지막 말인 필리베르를 이용해 파리 일대를 여행했다.


Section ⑦ 현대 포스터의 선구자 툴루즈 로트렉

프랑스의 19세기는 예술가들의 역할이 급진적으로 변혁을 가져온 시기이다. 그때까지 예술가들은 귀족이나 부유층 고객 만을 위해 예술품을 만들었다면, 이후부터는 그 동안의 진부한 작업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자신 만의 예술작품을 창작해서 프리마켓(시장)에다 팔기 시작했다.
예술가들이 추구한 새로운 주제나 혁신적인 형태, 그리고 새로운 스타일은 산업시대의 도래 및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경제 구조의 변화와 맞아 떨어졌다. 파리나 대도시의 예술가들 중에서 보다 진취적인 사람들은 도시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이려고 애썼다. 19세기 중후반까지, 석판화나 사진 등 대량으로 예술품을 제작하는 새로운 방식이 개발되면서 일반 대중들도 예술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된 것이다. 또한, 1890년대 들어 컬러 인쇄의 기술적인 진보와 포스터의 거리 부착을 제한하는 법률의 완화로 인해 파리 시내 곳곳에는 광고 포스터가 넘쳐났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보다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포스터를 대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로트렉은 사회 · 문화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작품의 소재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댄스홀 · 카페 · 극장 등 번창하는 파리 ‘벨 에포크’의 활기찬 매력을 포스터에 담아냈다. 로트렉의 포스터는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우키요에(부세회, 浮世絵)에서 영향을 받은 로트렉은 대각선 구도, 과감한 자르기, 배경 생략,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굵고 진한 선, 사선 문양 등을 활용하여, 당시 화가들의 고전적인 회화 기법을 훨씬 뛰어넘는 솔직함과 담백함을 보여주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던 클로드 모네(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부르주아적인 전통방식을 거부하고 아방가르드 방식을 모색했다. 이런 로트렉의 미술적인 실험은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는 계기가 됐다.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는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로도 평가받는다. 당시의 수집가들은 그의 포스터를 높게 평가하였으며,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는 그의 저서 「작품(L’oeuvre)」(1886)에서 “이 젊은 화가가 모든 곳에서 전통적인 미술 아카데미를 모욕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19세기의 무정부주의이자 예술 비평가였던 펠렉스 페네옹(Félix Fénéon, 1861-1944)은 “감초를 사용해 민망한 쾌락을 느끼게 만드는 엉터리 그림들보다, 훨씬 활력있는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를 손에 넣으라.”고 하면서 그의 포스터를 파리의 벽에서 떼어 가질 것을 부추기기도 하였다.
로트렉은 짧은 생애 동안 31점의 포스터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들은 예술가의 전위적인 시각 언어가 보다 폭넓은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 역할을 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술작품이 대중 소비를 위해 제작되고 활용되는 최초의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1890년대,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에서 발견되는 예술 감각과 논리와 관행은 오늘날 현대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섹션에서는 로트렉이 남긴 포스터 31점을 상세한 해설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 드가세여 2020-03-27 22:22:33

    로트렉 전시를 이미 보고 온 친구가 재밌었대요. 도슨트 설명을 들었더니 더 좋았다고. 드가를 좋아하는 제게 '로트렉이 드가랑 라이벌이었다는데?' 라고 전해주네요. 로트렉이 궁금해졌습니다. 전시 기대돼요!

  • 처피 2020-03-27 17:41:41

    보고싶은 단 하나의 전시인데 늘 서울갤러리에서 양질의 전시 정보를 발빠르게 구하고 얻을수있어서 즐겨찾기 1번지랍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올께요.

  • shwang5 2020-03-24 18:21:34

    좋은 작품 잘 감상했습니다.

  • cisilee 2020-03-12 01:37:35

    좋은 작품 잘 감상했습니다.

  • cisilee 2020-03-12 01:42:36

    당국으로부터 게재가 거절당한 작품까지 볼수 있는 귀한 전시회라 꼭 가서 봐야겠습니다. 가서 그의 천재성과 자유분방한 구도와 색채를 흠벅 맛보아야겠습니다.

  • 귤컴 2020-03-22 08:59:17

    너무 기대되는 전시에요. 꼭 보고 싶습니다. 아이와 함께 보고 싶은데 좋은 추억이 될 거 같아요.

  • 허정인 2020-03-22 20:31:54

    로트렉의 강렬하고 묘한 포스터의 세계를 만나보고 싶네요!

  • 뚜루루 2020-03-23 21:52:09

    기대되는 전시입니다. 툴루즈 로트렉 작가님은 제게는 생소한 작가인데요 이번 전시로 알아가야겠습니다.

  • 세호대디 2020-03-24 06:55:58

    그래픽 아트 선구자라 불리는 툴루즈 로트렉의 멋진 영감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생전 무수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열정이 느껴지네요.

  • 테레즈 2020-03-09 21:14:26

    벨에포크 시대 물랑루즈의 자유로움, 화려함과 그 너머의 어두운 면도 잘 표현한 로트렉 좋아요.:)

  • yunye0 2020-03-26 23:49:12

    툴루즈 로트렉 참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유독 그림이 한 점 한 점 강렬하게 남는 작가예요..

  • 그린비찾다 2020-03-25 00:36:02

    상당히 매력적인 그의 그림, 그는 작을지 몰라도 그의 그림은 절대 작지 않아요.

  • 2020-03-02 15:07:13

    좋은 작품 잘 감상했습니다.

  • 김겨울 2020-03-28 10:36:23

    보스턴에서 교환학생 있을 때 미술관에서 로트렉의 작품들을 인상깊게 잘 보았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 둔 지금, 그 때와는 달라진 조금은 더 성숙해진 저의 시각으로 로트렉의 작품들을 한번 더 보고 싶어요. 이벤트 미션 완료 하였습니다 :)

  • seonnyillu 2020-03-29 01:33:04

    몽마르트의 여인들과 파리의 밤이라니, 너무 낭만적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써 꼭 보고 싶은 전시입니다!

  • 자주엉겅퀴 2020-03-29 13:01:18

    좋은 작품 잘 보았습니다. 연필 드로잉의 섬세함과 포스터의 강렬함을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미션 완료했구요~ 이벤트 당첨에 기대를 해봅니다.

  • 자스민티 2020-03-29 22:40:30

    자신의 결점과 열등감을 최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인간적으로도 본받을 점이 많은 화가입니다. 로트렉의 선이나 색감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우울도 참 멋있고요. 예술의 전당에 혼자라도 발걸음을 하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당첨이 된다면 디자인을 전공한 제 친구를 데려가고 싶어서 댓글을 씁니다. 덕분에 작품란에도 들어가서 예쁜 제 취향의 유화작품도 많이 감상할 수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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