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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개인전 '木林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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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

    김명숙

  • 장소

    인디프레스갤러리

  • 주소

    서울 종로구 통의동 7-25

  • 기간

    2019-12-06 ~ 2020-01-12

  • 시간

    11:30 ~ 18:3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연락처

    070-7686-1125

  • 홈페이지

    http://www.facebook.com/INDIPRESS

  • 초대일시

    2019-12-06

  • 관람료

    무료관람

갤러리 가기

■ 전시소개

인디프레스에서 열리는,‘木, 林, 相’전은 92년 덕원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시작으로, 1988년에 한국에 돌아온 김명숙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알린 나무와 숲 그림 중의 일부이다. (첫 개인전은 1989년‘studies for Sisyphus’) 그것들은 지금도 진화 중인 시리즈이다. 간혹 홍조를 띄거나 푸르스름하게 빛나기도 하지만, 대개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띄는 나무와 숲은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요즘의 시기를 알려주는 듯하다. 실제의 수령과 무관하게 해묵은 느낌이 있는 작품 속 식물들은 모나리자 초상의 어슴프레한 뒷배경처럼 오래된 공기를 머금고 있다. 미술 비평가 르네 위그는 모나리자의 초상을 분석하면서 여인과 오래된 바위를 비교한 바 있는데, 오래된, 또는 오래되 분위기의 작품은 비록 작품 안에 자리 잡은 것이 생물이라고 할지라도 광물질적인 시간성이 베어 있다. 이러한 장구한 시간성은 원시나 고대 문화의 특징이며, 좀 더 짧은 주기로 모든 것이 순환하는 현대적 시간에서는 낯선 것이다.

(중략)

실제로 깊은 바닷속에서 수 백 년을 살아온 상어나 거북이는 거의 암석 같은 모양새가 특징적이다. 죽음과도 비교될 수 있는 주변 환경과의 동일화이다. 그러한 생물의 오랜 수명은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최소화하는, 불교의 금욕수행을 떠오르게 하는 삶의 방식 때문이다. 수 백 년, 수 천 년의 세월을 살기도 하는 나무 또한 주변과의 최소한의 관계의 산물이다. 동물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기에, 있는 자리에서 최대한 환경에 적응하는 나무의 생태가 형태로 나타난다. (중략) 인간의 희로애락을 속에 품은 채 몸살을 앓는 듯한 김명숙의 작품 속 나무와 숲들은 자유롭지 못한 존재에 각인된 흔적을 담고 있다. 재생과 순환을 약속하는 식물은 꽃이나 열매로 현실화되는 짧은 전성기와 그보다 더 긴 잠재적인 시기를 필요로 한다.

(중략)

화면 가득히 담긴 미시적 차원의 대상/과정은 평면성이 강조되면서 투명한 창으로서의 역할보다는 그림의 물리적 조건을 확인한다. 태양을 향해 뻗어 나가야 할 가지들이 산발한 머리처럼 방향성을 예측할 수 없다. 빛과 바람이 가세하면 명과 암이 뒤섞여서 거의 추상화가 된다. 자연적 형태의 해체가 극에 달했을 때조차도 최초의 창조물에 대한 인상이나 물질적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나무와 숲은 자유로운 붓질을 보이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는 실재재감의 원천이다. 김명숙의 복잡한 화면은 자연의 본질과 현상, 외관과 과정, 관념과 감성 모두를 아우르려는 불가능해 보이는 방향으로 수렴된다. 차분한 방향성을 가지는 유일한 정적 요소는 간혹 나타나는 숲 속의 오솔길이다. 저기로 가는 한 방향만 선명한 이러한 길(道)은 작업을 계속한다는 작가의 기본 태도만 확실히 할 뿐이다. 사방으로 뻗어 나온 잔가지들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더듬어가는 식물의 행동이 형태화 된 것이다.

(중략)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작가가 접한 숲 속의 신령한 기운들은 빛과 나무의 관계를 암시한다. 빛과 함께 나타난 나무는 그 자체가 에피퍼니(Epiphany, 현현顯現)와도 같은 것이어서, 작가에게 존재에 대한 직관과 통찰, 그리고 계시를 가능케 했던 어떤 신비로운 출현을 말한다. 공현절이라는 의미가 있는‘에피퍼니’는 올 9월에 열린 ‘카타바시스’전처럼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현대미술에서 무의식만큼이나 핵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순간성과 영원성을 연결하면서 모더니즘을 정의한 보들레르 이래, 평범함을 통해 불현듯 본질을 깨닫는 현대 예술가의 방식이 되었다.

(중략)

‘모든 풍상을 견뎌낸 실핏줄’이라는 작가의 말대로, 표현은 내부와 외부 모두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번개가 칠 때 에너지가 분배되는 패턴은 식물의 잔가지나 뿌리의 그것과 동형적 구조를 이룬다. 만약에 누군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의 뇌리에 그 인상이 각인되었을 때 눈과 뇌를 연결하는 망 또한 번개/나뭇가지와 비슷하다. 그것은 프랙털 이론에서도 주장되는 바이다. 번쩍하며 떠오르는 영감 같은 번개는 창공을 가로질러 피뢰침 역할을 하는 나무로, 그리고 이러한 우주적 사건을 목도하는 누군가의 신경계를 타고 스며드는 다차원적인 사건이다.

(중략)

끝없이 그어지고 겹쳐서 때로는 무화되는 선들의 축적을 통해 식물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다. 정확한 의미로 환원될 온전한 형태와 선명한 색보다는 무수히 많은 선들을 평면에 던져가며 형상을 구축/해체되는 김명숙의 형식과 실물의 표현은 어울린다. 김명숙의 작업 목록에는 식물 외에 자화상, 미술사적 도상, 동물, 심연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포진해 있지만, 식물 자체가 섬유질, 목질소 같은 선적(線的) 요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내리그은 선들은 그만큼 오르내렸을 수분과 양분의 통로를 가시화한다. 기능이 바로 형태가 된 선들은 조형적 언어를 낳는 행위와 중첩된다. 광합성이라는 식물 고유의 활등은 빛과 식물의 내재적인 관계를 말한다. 땅속 어둠과 하늘의 빛을 연결하는 통로인 나무는 그에 걸 맞는, 경계가 모호한 조형적 어법을 낳았다.

인디프레스 갤러리 전시 전경

어두운 숲 속에서 지상적 존재의 세세함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빛이다. 빛은 화면 어디에서인가 유령처럼 출몰하여 화면 여기저기에서 폭발하게 한다. 빛은 나뭇가지들을 춤추게 하고, 절규하게 하며, 하염없이 기다리게 한다. 빛은 죽은 채, 또는 죽어가는 채 서 있는 몸체의 굴곡 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다양한 양태에도 불구하고 빛은 나무가 지상에 수직적으로 서 있어야 하는 존재의 근거를 제공하는 원천이며, 작가는 이를 극적인 명암법으로 제시했다. 나무와 숲들은 배경과 밀도만 다른 선의 축적, 때로는 쓸어내림 등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지상과 천상을 잇는 상하의 운동성을 가진다. 변이를 낳는 시간성의 축적은 나무의 성장 과정과 김명숙의 작업과정에 공통된다. 이러한 수렴은 작업을 자연스럽게 함과 동시에 고통스럽게 한다. 작가가 즐겨 인용하는 ‘PAINT는 PAIN에 T를 붙여주는 것’이라는 루시앙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연이든 예술이든 모든 성장, 생성, 생산에 있어 고통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벼락맞은 나무 시리즈는 시간의 축적이 주는 존재감을 한껏 뿜어낸다. 93년 맨 처음 그리기 시작해서 2005년까지 근 10년 넘게 그린 시리즈이다. 이 연작은 독일의 어느 다락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깨어난 이른 아침 창 너머로 벼락 맞은 수양버들을 마주한 산물이다. 굴곡 면이 복잡한 고목이 벼락까지 맞은 형태에서 여러 미묘한 표정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나무를 그릴 때 그것은 풍경화가 아니라 초상화라고 강조한다. 이 시리즈는 비슷한 크기이며, 최초의 작품은 몰입해서 그리느라 종이를 덧대가며 그린 것이다., 번개로부터 영감을 보는 작가에게 최초로 그린 작품은 나중에 조형적으로 더 세련되게 정리된 작품보다 더 애정을 가지고 있다. 벼락 맞은 나무는 수억 볼트의 전류가 관통하면서 마치 가마에 들어간 흙처럼 속속들이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질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나무는 물에 넣으면 아래로 가라앉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진다.

그래서 벽조목으로 알려진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거의 돌만큼 강도가 강해져서 오랫동안 사용해도 닳지 않는 도장이나 염주 등의 재료로 사용되고, 가격도 비싸다고 한다. 또한 그것은 악귀를 물리치는 부적의 역할도 한다고 민간에 알려져 있다. 유기체로서는 죽음에 가까운 재난이 그 자체를 더 강인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물리적 대상에는 없는 영험한 기운까지 획득하는 과정은 샤먼이나 예술가에게도 공통된다. 김명숙의 작품에는 삼계(三界)를 넘나드는 샤먼과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그리고 이러한 변신의 가시적 상징물인 나무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종교사 개론]에서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여 하늘-대지-지옥을 연결하는 생명의 나무에 대한 신화의 기원을 동양(메소포타미아)에서 찾는다. 굿판으로 나타나는 샤먼의 독특한 행위는 이러한 신화적 구조에서 생겨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샤먼이 신비적 여행 중에 하늘을 오를 때 그는 계단이 나 있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게 된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서양의 예는 ‘야곱의 사다리’일 것이다. 나무는 무엇보다도 지지점이다. 따라서 하늘과의 소통은 나무를 중심으로 해야 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존재 양식의 변화,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 우주적 모태로의 회귀인 죽음은 우주적 생명의 원천과의 재접촉이다. 수많은 인류학적인 증거는 인류의 상상계에서 인간이 지상의 조건을 벗어나 비상하고자 했을 때 나무는 자연스러운 매개가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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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름의 자리에 너무 가까이 와 있다
나는 최초의 벼락을 기다리는 중이다.

[소나무와 벼락]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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